두 아들

(2019-03-28)

예수님은 권위를 두아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가신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라는 지위에 (혹은 신분에) 있지 않다. 아들이 순종할 때 권위가 있다. 불순종할 때는 아버지라는 지위는 있어도 권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런데 이 뜻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신다. 권위는 권위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바로 권위자에 대한 이 믿음이 없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시는것 같지만 실상은 세례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왔음을 믿었다고 하신다. 이들은 작은 자들이다. 작은 자들이 믿은 것을 보고 큰 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뉘우치고 믿었어야 했는데 어리석음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자들인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다. 여전히 나중에 들어갈 기회가 있는 듯 보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았다.

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57-66

날이 저물었다.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부자가 왔다. 그도 예수의 제자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고, 빌라도는 허락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서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셨다. 그리고 무덤 어귀를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이 무덤까지 와서 지켜보았다.
다음날, 곧 예비일 다음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가 사흘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으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 무덤을 단단히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간 후 백성에게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말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줄 테니 물러가서 재줏껏 지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막은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 그는 부자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했는데, 요셉은 예수의 제자 되었다. 그는 힘들다는 좁은 문을 통과했다. 예수와 함께 다닌 기록은 없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총독 앞에 나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할 정도로 제자의 자격을 갖췄다. 그리고 기꺼이 자기 묘자리를 예수께 내드렸다. (묘자리는 상속할 수 없는 자기가 가진 마지막 것을 상징하지 않는가?) 하여간 부활신앙을 가진 자만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두 마리아 – 두 여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거둔 곳까지 따라가서 지켜보았다.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든 이들의 시선은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았다. 끝까지 예수를 따라가며 푯대를 바라 봤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내실 수 밖에 없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거짓 부활이 신경쓰였다. 사실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예수의 진짜 부활이 아니었을까? 진짜로 부활하신 예수 앞에 그들이 어떻게 설 수 있을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부정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거짓으로 부활을 전파할까봐 걱정했다. 부활논쟁에서 예수 앞에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기뻐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부활을 진짜로 믿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들이 부활을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공권력을 빌어서라도 무덤을 봉하고 봉하고 또 봉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땅의 시공간 너머의 사건이다. (빌라도는 뭘 알고서 재줏껏 지키라고 말했을까?) 분명한 것은 영원에 잇대어 사는우리 성도는 이미 부활에 참여한 자다.

마태복음 27:45-56

마태복음 27:45-56

정오(제육시)부터 오후 세시(제구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혔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하고 크게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변 사람들은 예수의 외침에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예수로 마시게 했다. 대다수의 무리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는지 지켜보자고 수근거렸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고, 지진이 났고,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예수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말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리리에서부터 따라 온 많은 여자들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았다. 이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세 시간 동안의 암흑 – 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오의 태양이 그 빛을 잃었다. 그 세시간 동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역사하신 시간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예수께 찾아오신 시간이다. 사람들에겐 죽은 (멈춘) 시간이지만, 삼위 하나님에게는 영원에 잇대인 시간이다.
//세 시간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신 후 운명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에 찰라의 단절이 생겼다. 우주적인 시간으로 함께 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단절의 괴로움을 사람이 어찌 알랴. 조실부모한 나는 육십이 다 되어 팔순 구순을 넘기신 부모님을 여의는 친구들의 슬픔을 알 수 없다. 나는 부모와 겨우 십년을 함께 지냈다. 친구들도 그래 봤자 부모와 반백년 조금 더 함께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교제는 영원이라는 시간 너머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버리셨다’라고 표현한다. “그때 왜 날 버렸습니까?” 어릴적 해외로 입양나간 사람들이 부모를 찾아와서 묻는 말이 아니던가. 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시공의 단절이 아닌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사람은 절명의 위급한 순간 뇌리에 평생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한다. 세 시간의 암흑은 예수께 이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백부장의 증언 – 예수를 패전국의 왕처럼 대하며 희롱했던 로마병사의 백부장은 어둠을 지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 드물겠지만 암흑과 지진과 같은 자연의 소리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태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가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한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일은 골고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가 부활하신 주님과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사흘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닌가? 죽었던 성도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활의 때와 마지막 때를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이땅에서 죽을 때가 주님의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때다. 이미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죽음 너머의 시간은 이땅의 시공과 확실히 다를 것이다.
//여인들 – 십자가 형장 현장에 있었다. 예수의 죽음을 목격했으니 부활의 주님을 증언할 자격이 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성도라야 주님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7:27-44

마태복음 27:27-44

총독의 군병들, 곧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관정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희롱했다. 그리고 예수께 침을 뺕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다. 이렇게 희롱을 마치고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를 지우고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골고다로 가는 도중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골고다까지 가게 하였다. 골고다에 도착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다. 로마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가졌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었다. 이날 예수와 함께 강도 둘도 예수의 좌우편 십자가에 각각 못 박혔다. 십자가 형을 구경나온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예수를 모욕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고 함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것이다. 그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다.” 하며 희롱했다. 예수 좌우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같이 예수를 욕했다.

//로마 병사들 –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이들도 예수를 희롱하는데 동참했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대했다. 다만 예수는 사형을 앞둔 패전국의 왕이었다. 그들은 전리품을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봤자 예수의 옷뿐이었다.
//구레네 사람 시몬 – 그는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올라갔다. 그가 져야 할 십자가가 예수의 십자가 였다는 것은, 성도 각자가 져야할 자기 십자가 역시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을 교훈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죄값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도 그래야 한다. 정죄보다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두 강도 – 마태는 한쪽 강도의 회심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쪽 강도 모두 예수를 희롱하는데 동참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한 편 강도는 처음에는 희롱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태도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누가는 한 편 강도가 예수의 행한 것이 옳지 않은 없다고 말했다고 기록하며 처음부터 예수를 의로우신 하나님과 동일시 한 것처럼 기록한다. 그는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간청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나구원에 있으리라” 하고 화답하셨다. 그는 최후의 순간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예수를 알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복음 그자체였다. 예수 앞에서 늦은 때는 없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희롱의 말이지만 구구절절 옳다.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께 달렸다. 아버지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믿음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메시야(남을 구원하는 자)로 사셨다. 성도는 나의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고 이웃을 구원(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은 표징을 구한다. 이웃사랑 외에 달리 무슨 표징이 있으랴!

마태복음 27:11-26

마태복음 27:11-26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섰다. 총독이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총독의 말이 옳다고 답하셨다. 그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에 대한 신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자 놀라워했다.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 총독은 무리들에게 유명한 (극악한) 죄수 바라바와 그리스도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총독은 무리가 극악한 죄수 바라바보다 시기심으로 넘겨준 예수를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총독이 재판을 할 때, 총독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예수는 의로운 사람이니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전했다. 꿈에 자신이 예수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탔다고 전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다. 총독이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무리는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말했다. 총독은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다. 총독은 예수에게서 무슨 악한 일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무리는 더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아,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예수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하며, 피값은 무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리는 그 피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에게 돌려도 좋다고 말했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었다.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 예수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총독에게 어떻게 예수를 넘겼길래, 총독의 첫 신문은 ‘당신은 유대인의 왕입니까?” 였을까? 총독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왕’이라는 단어에 차이가 없었을까? 예수께서는 총독의 첫 질문에만 ‘그렇다’라고 대답하신 후 묵비권을 행사하신다. 기소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총독은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만 인정되셨다. //총독 빌라도 – 그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 예수의 태도에 놀랐다. 기소내용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로부터 죄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더욱 놀랐을 것이다. 벌금형도 아니고 사형을 구형하는 기소였는데도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자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총독은 아내의 내조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무리들의 눈치를 봤다. 총독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바로 사용하지 못했다. 위로부터 받은 권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책임을 자신의 이름으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에게는 예수를 죽일 권한마져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총독에게 데려간 것이었다. 총독이 예수에게서 유죄를 선고하지 않자, 그들은 무리들을 충동했다. 총독에게는 민란보다 더 귀찮은 일을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수를 인민재판에 세우고야 만다. //무리들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에 놀아났다. 얼마전 ‘호산나’를 외쳤던 그들의 입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예수의 피값이 자신들을 죄값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과 자손들에게 돌려도 좋다고까지 말했다. 목자 없는 양들이다. //빌라도의 아내 – 그녀가 빌라도에게 전한 말이 전해진다. 그녀는 예수를 의롭다고 말했다. 돌려서 말하면 죄가 없다는 뜻이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의로우신 분,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충고는, 감히 하나님(신)과 다투지 말라는 뜻이다. 빌라도의 아내가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