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1-10

마태복음 27:1-1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을 마치고 새벽부터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갔다.
예수를 판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에게 유죄를 선고하자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유다는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했으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돌아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거두며, 핏값을 성전창고에 넣는 것은 옳지 않다며,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 밭은 ‘피밭’이라고 불렸다. 마태는 이것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의 성취라고 주석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하며 울었다. 유다는 스스로 뉘우쳤다.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기만 하면 회복되는가?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잘못도 마찬가지다. 죄값을 치러야 한다. 베드로에게는 죄값을 치를 기회가 주어졌으나, 유다는 죄값을 치를 기회마져 스스로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물론 베드로가 스스로 죄값을 치른 것은 아니었다. 주인되신 예수께서 치러주셨다. 유다는 스스로 잘못을 뉘우쳤지만, 예수를 주인으로 다시 모시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죄값을 치른다고 자살했다. 그러나 자살로는 죄값을 다 치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살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마음이 굳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ㅠㅠ 주님 앞에서 교만한 마음도 문제지만, 마음이 굳어도 문제다. 완악한 마음은 교만과 같다. 반면 베드로는 수제자의 자리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첫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낮아지면 자신이 죄인됨을 시인하게 된다. 죄인이 바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뿐이다. 누가복음 18:13에서 세리의 기도가 그랬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예수께서 선언하셨다. ////베드로가 유다보다 나은 것은 스스로는 죄값을 치를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말씀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6:57-75

마태복음 26:57-75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셨다.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모여있었다. 베드로도 멀찍이 떨어져 예수를 뒤따라 대제사장 집 안마당까지 갔다. 그는 하인들 틈에 끼여 앉았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의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거짓증거를 찾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쓸만한 증거는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두 사람의 증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당신이 말하였소”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 소리로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말했다.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직접 들었으므로 다른 증인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대제사장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묻자, 그들은 예수가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춰 보라아” 하고 놀렸다.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한 하녀가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주변 사람들 앞에서 부인했다. 베드로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대문 있는 곳으로 나갔다. 다른 하녀가 베드로를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며 부인했다. 조금 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저주하여 맹세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 예수와 한 패! 그런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르자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 그것도 세번이나. 한 번 주님을 부인하자 ‘멀찍이’가 한 걸음 더 멀어지고, 두번째는 맹세하며 부인하게 되고, 세번째는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다. 베드로는 함께 다니고 한패였던 예수와의 단절을 선언해야 할 정도로 죽음 앞에 무기력했다. 그러나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이 마음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룟 유다보다 못한 베드로를 살렸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두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예수를 보라. 겟세마네 기도의 힘이다. 예수의 마음을 괴롭히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담담하신, 아니 담대하신 예수는 겟세마네 기도의 결과다.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지기 바라는 기도에 대한 순종의 결과다. 이렇게 하나님과 한 뜻이 되셨다. 아버지 하나님과 원하는 것이 같아졌다. 세상을 이기신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요, 주님의 원대로 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6:36-56

마태복음 26:36-56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4/14/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을 앉히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만 데리고 기도하러 조금 더 가셨다. 예수께서는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 세 제자에게 마음이 괴롭다고 하시며 그곳에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혼자 조금 더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려서 “나이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하시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아예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가고 쉬라고 하셨다. 그리고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갈 때가 되었으니 일어나서 가자고 하셨다.
예수께서 아직 겟세마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모낸 무리를 인도해서 왔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가룟유다는 무리에게 자신이 입을 맞추는 사람을 잡으라고 미리 일러 두었다. 유다는 예수께 다가가 선생님 하고 부르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예수께서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물으셨다. 무리가 예수를 붙잡았다. 예수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자기 카를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그 귀를 잘랐다. 예수께서 그를 말리시고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명하셨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면 천군천사들을 보내 자신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이루어지도록 순순히 무리에게 잡히셨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기도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기도하셨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아버지 하나님이 뜻을 안다고 순종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감당하기 힘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타락한 사람의 마음을 거스리기 때문에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알 때까지 어쩌면 졸거나 자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내 맘대로 행하는 것보다 낫다. 내 뜻을 구하는 것은 (안하면 좋겠지만) 한 번으로 족하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이뤄질 때까지 똑같은 기도를(내 뜻을) 고집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쉬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라는 뜻이 더 강하다. 쉬지 않고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이뤄지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6:17-35

마태복음 26:17-35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준비에 대해 예수께 물었다.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데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 난 아무게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시는대로 준비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만찬자리에서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가룟 유다가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은 자기 몸이니 받아서 먹으라고 하셨다. 또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제자들과 함께 마시는 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만찬을 마치고 모두 감람산으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성취로, 오늘 밤에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했다.

//”나는 아니지요?”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지만, 나의 영이 어떤 영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열하나는 ‘주님,, 나는 아니지요?’ 라는 자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면, 가룟 유다는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주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 근심으로 사망의 길을 갔다. (요한복음13장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 열하나와 가룟유다의 예수께 대한 호칭은 크게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내가 주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의 맹세에 뒤따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주를 따르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실패담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의지적으로 주를 버리지 않아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신뢰하고, 그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만 가능하다. 내가 스스로 주인되려고 하는 것은 곧 주님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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