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1-20

로마서 3:1-20

유대 사람이 나은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10)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11)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12)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저주와 독설로 가득 찼다.(13,14)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다. (15) 파멸과 비참의 길을 가며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6,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없다. (18)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이다.

//2장에서 불의를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고 정의 했는데, 이기심은 평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화를 알지 못하니 서로를 속이고 저주하고 독설을 퍼부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는 파멸과 비참의 길을 가는 것이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선한 일, 곧 하나님이 뜻대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지 않으니 의인도 없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을 따라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유죄판결를 받는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실력으로는 (율법/양심의 행위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죄를) 깨달음이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실력 (율법의 행위) 대신 다른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자기 실력으로 떡(생명양식)을 먹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https://quietwaters.blog/2018/09/05/

로마서 2:17-29

바울은 유대인, 율법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고 서술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요,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 되었다고 생각하며,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유대인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도둑질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도둑질 하냐고 묻는다. 간음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왜 간음하는지 묻는다. 우상을 미워하면서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치냐고 묻는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묻는다.
바울은 유대인의 이런 언행불일치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고 말한다. 율법을 지켜야 할례를 받은 것, 곧 주님의 언약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된다고 말한다. 곧 언약과 무관해 진다. 오히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이 할례를 받은 사람, 곧 언약백성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바은 유대인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로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언약백성은 율법의 조문에 따라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마음에 참할례를 받은 사람이 언약백성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롭다’ 하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은 율법이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바울은 혈통적 유대인이 더이상 참유대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곧 육적 할례를 받은 사람이 언약백성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언약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언약 백성이 아니라도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성도로 부름을 받았어도 불의하게 사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 나의 성도됨의 표지는 무엇인가? 선한 일로 드러나야 한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https://quietwaters.blog/2018/09/04/

로마서 2:1-16

로마서 2:1-16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라 하여도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니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성도라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는 수 밖에 없다. 만약 회개할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까지 자기가 받을 진노를 쌓고 있는 꼴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한 일, 곧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이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고통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 없이 망할 것이고,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다. 율법과 상관 없는 이방 사람이라도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 사람의 본성이 그 사람에게 율법이 된다. 그런 사람은 양심을 법을 따른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내세우실 그날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이시는 분이심을 선포한다.


//바울은 선한 일과 대비되는 불의를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한 일이란, 예수께서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하셨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다. 앞에서 복음, 하나님의 능력을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의 연합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선한 일에 대비되는 불의는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 성들의 연합을 깨뜨리는 일이다. 바울은 그래서 불의를 이기심에 사롭잡혀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데 이기심만한 것이 또 있을까? //예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고, 듣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다고 하셨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롭다.’ 하고 풀어낸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심을 전제로 한다. 그 누구도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 무죄를 받을 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야 한다.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했다. 그러니 바울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운운한 것은 정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구원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내세우시는 이유다. 성도는 선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로 영원한생명을 누리는 자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요, 성도가 따라야할 길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심판의 그날이 있다는 소식이다. 한편으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이다. 회개가 선을 행하도록 이끈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03/

로마서 1:18-32

로마서 1:18-32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복음의 반대 개념을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 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이라고 풀어낸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생명이다’ 라는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삼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성도들 간의 연합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연합을 깬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깬다. 하나님을 몰라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면 진리와 경건함과 의로 반응하는 것이 마땅한데, 스스로 지혜있다며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배하고 섬기것이 마땅한데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으니,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성도가 연합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사형감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이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요, 하나님과의 연합이 생명이며 영생이라는 진리다. 반대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면 죽음(사망)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게한다. 복음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이 믿음이요 곧 생명(영생)이라는 선언이다. 말이 아니라,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임마누엘이 삶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02/

로마서 1:1-17

로마서 1:1-17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15 새번역)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한다. 로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6 새번역)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한다. 그리고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17 공동번역) 하고 풀어낸다. //복음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라는 구호처럼 단순하지 않다.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를 관계를 가지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이야 말로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복음은 불신자에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간에도 서로서로 끊임없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를 적었다. 생면부지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을 꿈꾸자!

https://quietwaters.blog/201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