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3:13-26

민수기 23:13-26

발락은 발람이 모압 평지 끝까지 진을 친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 놀란 것을 알아챘다. 먼지와 티끌보다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발락은 이스라엘 진영 일부만 보이는 곳으로 발람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제사상을 차려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다. 발람은 이번에도 혼자 주님을 만났다. 주님은 발람에게 또 할 말을 일러주셨다. 발람은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발락은 와서 들어라.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변덕을 부리지도 아니하신다.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아니하시랴? 어찌 약속하신 것을 이루지 아니하시랴? 나는 축복하라 하시는 명을 받았다. 주님께서 복을 베푸셨으니,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다. … 그들의 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 주님을 임금으로 떠받드는 소리가 그들에게서 들린다. … 이스라엘에 맞설 술법도 없다. 이제는 사람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물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찌 그리 크냐?’고. …]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려면 이스라엘에게 복도 빌지 말라고 말했다. 발람은 발락에게 무엇이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만 말했다고 대꾸했다.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 진영의 수에 놀라 이스라엘에게 저주하지 못하고 축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방 술사 발람은 이미 주님의 능력을 맛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먼지와 티끌 같이 많은이스라엘 진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크심을 확인하는 증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발람은 이것도 알았다. 하물며 저주를 구하는 제사랴!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번에도 홀로 제사 장소를 떠나 오솔길에서 주님의 신탁을 받는다. – 제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두번째로 신탁하신 핵심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약속(언약)관계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복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임금으로 떠받든다.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관계도 이와 같다. 복 중의 복은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계시고,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임금으로 떠받들어야 한다.
//하나님(신)은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전부가 되시는 분이시다. 세상사람들은 신들을 내가 최선을 다하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찾는다. 발람은 주님이라는 하나님을 그렇게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출애굽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신)이신 ‘주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때때로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을 자신의 유일한 신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신으로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릴 수 없다.
//주님은 발람의 입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넣어주셨다. 신탁을 입으로 뱉어내는 것과 소화시켜 순종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암송이나 낭송으로 끝내면 안 된다. 소화시켜 (하나님을 알아가는 만큼)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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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2:36-23:12

민수기 22:36-23:12

22:41, 23:9,10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친 진의 끝부분을 보았다. 그리고 티끌처럼 많은 이스라엘의 수에 놀랐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에게 이스라엘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의인의 회중이라는 마음을 넣어주셨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넣어주신 대로 발락 앞에서 “야곱은 티끌 같아 헤아릴 수 없고 이스라엘은 먼지 같아 셀 수도 없구나. 내 목숨이 올바른 사람(의인)처럼 끝났으면! 내 여생도 그들(의인)과 같았으면!” 하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주 아닌 축복을 마무리했다.

//발락은 축복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발람에게 축복의 댓가를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회중이 누리는 것이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들이 누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누린다.
//발람은 신탁에서 ‘나는 정직한 사람이 죽듯이 죽기를 바란다. 나의 마지막이 정직한 사람의 마지막과 같기를 바란다’ 하고 자기 고백으로 마친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넣어주신 말씀이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사람의 의지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했다고 모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또 아니다. 발람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먼지와 티끌 – 먼지와 티끌이라도 모이면 태산이 된다. 메뚜기 같아도 떼로 모이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한 마리의 메뚜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인의 회중은 하늘을 덮는 메뚜기 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발람도 보았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을 치고 있는지 반성이 앞선다.

민수기 22:21-35

민수기 22:21-35

발람이 발락이 보낸 고관들을 따라 길을 나서자 하나님이 크게 노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라고 하셨으면서 크게 노하신 것을 보아,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가 원하는 말만 듣고 귀를 닫아버렸다. 발람의 귀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발람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발람이 타고 가는 나귀를 막아섰다. 나귀는 길을 벗어났다. 발람이 나귀를 때려 길로 돌이켰지만 주님의 천사는 나귀를 양쪽에 담이 있는 곳에서 막아섰다. 발람은 나귀를 또 때렸지만 주님의 천사 앞에서 나귀는 어쩔 수 없었다. 발람을 태운채로 주저 앉았다. 화가 난 발람은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그러자 주님은 나귀의 입을 열었다. 나귀는 주인 어른께 무슨 잘못을 했다고 세번씩이나 때리냐고 따졌다. 발람은 나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칼이 있으면 나귀를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귀는 자신은 지금까지 발람에게 충성했다고 말했고, 발람도 그것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있는 발람은 주의 천사를 불 수 없었다.) 그때 주님께서 발람의 두 눈을 열어 주셨다. 발람은 그제서야 칼을 빼어 든 천사를 보았다. 발람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천사는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에 막으려고 왔다고 말했다. 나귀가 세 번이나 자신을 비켜서지 않았다면, 발람을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람은 주님의 천사에게 자기가 가는 것이 잘못이면 되돌아 가겠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일행과 함께 같이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말해주는 것만 말하라고 강조했다. 발람은 발락이 보낸 고관들과 함께 갔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한낱 미물인 나귀도 보는 주님의 천사를 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말씀을 마음에 두고 성령의 인도에 따를 때 정결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보는 복을 누린다. //함께 가거라. –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발람의 탐욕을 이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에게 드러내길 원하신 것이다. 발람은 결국 하나님의 사자로 발락에게 가는 것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발람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발락에게 가기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주관하신다.

#요나는 가야 했으나 불순종하다 가야했고, 발람은 가지 말아야 했으나 불순종하다 결국 가게 되었다.

민수기 22:1-20

민수기 22:1-20

//발람 –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방 점쟁이 발람. 주(여호와)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신)이 아니라는 증거다. (출애굽 사건으로 주님의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점에서 발람은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다. 이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받을 게 전혀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발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졌다. 하나님 또한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발람은 하나님과 대화한 후 발락이 보낸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발람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그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락이 재차 사신을 보내자, 발람은 한 번 더 하나님께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발락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하신 말씀만 전하라고 하셨다.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다고 하셨다. 말씀을 듣는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왜 발람에게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다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하신 말씀만 전하라고 하신데서 그 이유을 찾을 수 있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도, 발람은 발락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가라고 하셨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뜻이 달라지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가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면 스스로 가지 않는다고 응답해야 정상인데, 자신이 듣고자 하는 답이 나오자 하나님과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꾼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민수기 21:21-35

민수기 21:21-35

에돔을 우회한 이스라엘은 아모리 땅을 지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에돔 왕과 마찬가지로 시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혼은 그의 백성을 소집해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오히려 칼날로 아모리 사람을 쳐서 무찌르고 그리고 암몬지역까지 나아갔다. 이스라엘은 아모리의 모든 성읍을 차지하고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 헤스본까지 빼앗았다. 이스라엘은 헤스본에서부터 시혼이 빼앗았던 그모스 신을 섬기는 모압의 아르, 아르논까지 차지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주했다. 모세는 사람을 보내 야셀을 정탐하고 그 촌락들을 빼앗고 그곳에 있던 아모리 사람을 몰아 내었다. 그들이 바산 왕 옥에게로 피하자, 옥이 자기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러 나왔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주님은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바산 왕 옥에게도 행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바산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그 땅을 점령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제 에돔은 우회하게 하셨지만, 아모리와 바산은 정면돌파하게 하셨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선제공격을 해오자, 주님은 아모리 왕과 시혼 왕의 포악성을 벌하셨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친 역사는 후대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자랑하는 사건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긴 싸움이라고 해도 전쟁은 두려운 것이고, 환난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피할 길만을 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돌파하게 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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