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21-31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천명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복음은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복음이 율법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율법과 상관 없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온다. 이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무죄) 선고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을 때, 무죄선고가 유효하다. 유죄인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그럽게 봐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께서 참고 참으시다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다 의롭다고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다.
따라서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다. 행위의 법으로는 유죄였다. 다만 믿음의 법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신다. 따라서 할례 받은 유대 사람들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믿는 믿음!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은 명사형이다. 요한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말과 혀로만 믿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믿어야 한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선언하는데,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곧 마음에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말로 내뱉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이 타파하려는 ‘행위구원’은 율법의 행위지,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어떻게 믿음을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일을, 곧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선한 일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유죄인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너그럽게 봐 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자비와 긍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유죄인데 무죄를 받았다. 성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신무죄 무신유죄의 사람들이다. 누가 감히 유죄의 삶을 다시 살려고 하겠는가? 유전무죄를 맛본 사람들은 돈을 믿기에 여전히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 앉는 삶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유신무죄를 맛본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 信은 믿음이요, 이 믿음은 곧 예수다. 유예수무죄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하는 사람이 무죄를 선고 받는다. 이것이 믿음의 법이다. 믿음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요한은 이 믿음을 형제사랑이라고도 말한다. 요한은복음서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요한일서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하고 적용한다. 믿음을 형제사랑이라고 한 것이다. ‘이신득의’의 믿음은 믿는 믿음의 다양한 열매다. 나에게는 어떤 믿음의 열매가 있는가?https://quietwaters.blog/2018/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