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18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울이 자신에게 큰 슬픔이 있고,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동족인 겨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주를 달게 받겠다고까지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이 약속들이 있는 동족 이스라엘! 믿음의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혈통으로 태어나셨다. (이 예수는 만물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아멘!)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며,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풀어간다.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다. 리브가도 이삭에게서 쌍둥이를 수태했지만, 둘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곱이 약속을 상속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상관없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셨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뜻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8/
//바울은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 자손을 생각한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하면서 논증을 시작했다. 그러나 8장에서 바울은 이미 그 무엇도 자신을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을 불러온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확실해 보인다. (또 요한의 글을 빌리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기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머물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누린다. 주님과의 연합이 없다면 완악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할 것은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