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9-29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하실 수 있는가? 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가? 이 두 문제도 신학적인 문제다. 바울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로 답을 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에 비유한다. 토기장이는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천한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며 너그럽데 대해주시고, 또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신다. 바울은 구약에 정통했다. 호세아,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주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8/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방향은 진노가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향해 흐른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기 위해 만들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 만들듯.) 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이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저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저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저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만이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귀하냐 천하냐) 따지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 그릇 (긍휼의 그릇)인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이마저도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진노가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향해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