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3-23

로마서 14:13-23

형제자매를 서로 비판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라고 했다. 바울은 형제자매에게 거칠 것을 두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바울은 속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무엇이든 우리가 속되게 여기면, 그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 된다. 음식이 그렇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형제자매가 근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음식으로 형제자매를 망하게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게 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 음식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다시 한번 만물이 다 깨끗하지만,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식문제로 형제자매를 실족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 의로 스스로를 정죄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의심하고 먹으면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된다.

//하나님의 사업은 화평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다. 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형제자매를 비판하는 것이다. 바울 시대에는 먹는 것과 절기준수가 대표적인 문제였다. 오늘날에는 더 다양한 이슈로 나뉜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형제자매를 판단할 권리는 없다. 사랑할 빚만 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도 칭찬을 받는 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증거다. //// 음, 우리의 대적은 무엇인가? 성도들 간의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아닌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할 이유다. 우리가 없애야 할 대적은 원수(enemy)가 아니라 원수 되게 하는 enmity 다.

로마서 14:1-12

로마서 14:1-12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권세가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감내해야 할 의무도 있다. 사랑이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이 약한 사람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셨는데, 우리는 믿음이 강하다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먹거리에 대해서 업신여기기도 하고 비판하지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할 입장이 아니다. 우리 역시 평가를 받아야 할 주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일꾼으로 세워주시면 그는 주님의 일꾼이다. 우리는 또 어떤 날이 다른 날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바울은 어떤 날을 존중히 여긴다면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주님을 위하여 음식을 먹고 감사해야 하듯,, 음식을 먹지 않을 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모두의 주님이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자매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피평가자다. 평가자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평가자 이신 주 하나님께 정직하게 보고하게 된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사람은 형제자매를 비판하지 않는다. 업신여기지 않는다. 형제자매는 누구나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 우리가 형제자매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결국 한 몸의 지체된 형제자매들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다. 누워서 침뱉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피평가자다. 평가자이신 주님께 정직하게 보고할 시간이 멀지 않다.

로마서 13:1-14

로마서 13:1-14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은 성도는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해야 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이제 바울은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권세들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일을 한다면 치안관들도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좋은 일을 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다. 그렇다고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하라고 말한다. 같은 이유로 세금도 바치라고 말한다. 권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이 의무라고 가르친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이다. 모든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다.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빛 가운데 행하듯, 단정하게 행해야 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28/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무엇인가? 권위와 권능으로도 번역된다. 어쩌다 권한이나 관할로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권리 (고전 7:37)나 자유로 (고전 8:9) 번역되기도 한다. 권세는 통치자나 위정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짐이 곧 법이나 국가였던 시대에는 동일시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권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소위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권리 (자유)가 정부의 권리 (권위)보다 더 높다. 따라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위정자들에 대란 복종이 아니라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권면으로 적용하면 좋겠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리라. (왜 갑자기 이 구절이 끼어 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빚은 권세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다.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다. 세금 내는 것은 의무다. 그리고 펀치를 날린다. 이웃사랑은 의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적용하는 방편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마치 이웃에 대하여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다. 성도들이 (성실히) 힘써야 할 의무는 ‘이웃사랑이다.’ 빚을 갚아야 하듯 ‘이웃사랑’을 해야 한다. ‘이웃사랑’은 결국 준법이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들이다. 교회학교의 교복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찰을 달았으면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권세의 정점이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단정해야 한다.

로마서 12:9-21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생활하라고 권면을 시작한 바울은 느닷없이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거짓없는 사랑이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하나님의 뜻)을 굳게 잡는 것이라고 적용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은 어떻게 드러날까? 형제사랑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먼저하는 것이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일하는 것도, 성령에 순종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도, 소망을 품고 즐거워 하고, 환난을 당할 때 인내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말아야 한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평화란 사랑이 편만한 모습이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 바울은 스스로 원수 갚지 말고 그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거듭 강조한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리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원수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교훈한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악에게 지는 것이다. 선 (하나님의 뜻)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사랑 중의 사랑은 형제사랑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사랑이 곧 믿음이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요1 3:14)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증거는 형제사랑이다. 그렇다, 믿음의 증거는 형제사랑이다. 형제사랑이 원수까지 사랑하는 원천이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27/

로마서 12:1-8

로마서 12:1-8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은 바울은 형제자매들에게,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한 예배라고 선언한다.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형제자매 각 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고 명령한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은 한 몸에 속한 지체로 서로 그 역할이 다르다고 말한다. 지체들은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선물을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해야 한다. 예언도 믿음의 정도에 맞게 해야하고, 섬기는 일도 믿음의 정도에 맞게 힘써야 한다. 가르치는 일도, 권면하는 일도 믿음의 정도에 맞게 해야 한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을 해야 하는데 순수한 마음이 곧 믿음의 정도에 맞는 마음이다. 지도하는 사람의 열정도 믿음의 정도에 맞아야 한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하는데, 이역시 믿음의 정도에 맞아야 한다.

//11장까지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결정된다고 풀어왔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형제자매들에게 권면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에 대한 권면이지만, 구원을 유지하는 믿음에 관한 내용이다. 구원을 유지하는 것이 영생이다.
//3절에 형제자매 각 개인들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아, 1,2절은 공동체적 명령(권면)이라고 생각된다. 성도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드릴 합당한 예배다. 2절도 여러분 대신 교회 공동체를 넣어 읽어 본다. 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성도 개인은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나의 믿음의 잣대를 가지고 형제자매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믿음의 크기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유무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교만하지 말라고 하신다. -부르심은 개인적이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연합이면서, 동시에 교회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는 공동체적 부르심이다. 그래서 부르심은 다양하다. 은사도 다양하다. 일의 태도도 다양하다. 그러나 부르심의 본질은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다. 한 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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