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30-10:4

로마서 9:30-10:4

바울은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에서 난 의라고 선언한다. ‘의=하나님’의 등식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얻은 것은 믿음에서 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추구해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지 않고,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준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려는 마음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데, 그들은 율법 준수를 해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다. 이스라엘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해서,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쓸뿐,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결국도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신뢰=순종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하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실 수 없으니, 알고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사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이 올바른 지식에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은 이 ‘사귐’이 없다는 의미다. 교제가 없으니 ‘임마누엘’이 아니다.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끝마침)인 사랑의 주님이시다. 이 지식이 있다면,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배가 사랑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형제 사랑이다. 요한도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고 교훈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지만 율법의 마침이 되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20/

로마서 9:19-29

로마서 9:19-29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하실 수 있는가? 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가? 이 두 문제도 신학적인 문제다. 바울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로 답을 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에 비유한다. 토기장이는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천한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며 너그럽데 대해주시고, 또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신다. 바울은 구약에 정통했다. 호세아,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주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8/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방향은 진노가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향해 흐른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기 위해 만들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 만들듯.) 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이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저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저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저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만이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귀하냐 천하냐) 따지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 그릇 (긍휼의 그릇)인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이마저도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진노가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향해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

로마서 9:1-18

로마서 9:1-18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울이 자신에게 큰 슬픔이 있고,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동족인 겨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주를 달게 받겠다고까지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이 약속들이 있는 동족 이스라엘! 믿음의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혈통으로 태어나셨다. (이 예수는 만물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아멘!)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며,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풀어간다.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다. 리브가도 이삭에게서 쌍둥이를 수태했지만, 둘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곱이 약속을 상속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상관없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셨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뜻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8/

//바울은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 자손을 생각한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하면서 논증을 시작했다. 그러나 8장에서 바울은 이미 그 무엇도 자신을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을 불러온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확실해 보인다. (또 요한의 글을 빌리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기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머물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누린다. 주님과의 연합이 없다면 완악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할 것은 많은데…

로마서 8:31-39

로마서 8:31-39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을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들을 누가 감히 고발할까? 하나님게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면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해 주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까?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바울은 확신한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어제 바울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고 선언했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등식을 제시한다.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음을 알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있으면 된다. 이 사랑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임마누엘이 복음이다.
////성도들은 이땅에서 ‘의롭다 하시고’와 ‘영화롭게 하신다’ 사이에 살고 있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난무한다. 다만 성도들은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이 소망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확신한다. 믿음이다. 복음이다. 주님과 영원히 연합해야 할 이유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7/

로마서 8:18-30

로마서 8:18-30

우리가 현재 겪는 고난이란 무엇일까? 로마의 핍박일까? 무엇이든 장차 우리 성도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바울을 평가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은 또 무엇인가? 피조물은 무엇에 허무하게 굴복했을까? 그러나 바울은 피조물이 굴복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굴복하게 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소망이 남아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을 소망이 있다. 모든 피조물은 이 소망을 가지고 함께 신음하고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 성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속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몸의 속량에 대한 소망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이 구원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 환난과 인내의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신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대로 모든 일이 서로 합력해서 선(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미리 아신다. 우리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https://quietwaters.blog/2018/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