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1-9

예레미야 5:1-9

‘너희가 그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역설적이게도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고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의 삶은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일침한다. 주님께서 찾는 것은 진실이다. 주님께서 회초리를 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않고, 주님이 멸망시킨다고 경고하시는데도 교훈을 받지 않는데, 아니 주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그들에게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의 길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도 몰라 어리석게 행동할까 하여, 부유하고 배운사람들에게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한 끈을 끊어버렸다. 그 결국은 맹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가 아주 크고 매우 크다. 이런 예루살렘이 용서 받을 수 있으랴! 하나님을 떠나서 신도 아닌 우상들에게 맹세하고 우상들을 섬기는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먹을 것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 음행을 하고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일을 주님께서 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주님은 이들을 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다.

//제 멋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많다. ‘OMG!’을 입에 담고 살아도, ‘Jesus Christ’를 내뱉어도 그들의 마음에 주님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삶이 다르다. 주님께서 찾는 것은 진실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곧 주님이 찾는 사람이다. 한 사람 예레미야가 있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명 더 찾으라 했으나 찾지 못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부유하고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없었다. ㅠ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함께 거하시지 않으신다. 용서를 구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신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결박당한 삶. 이런 삶을 함께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 합심해서 죄를 돌이켜야 한다. 합심해서 구해야 할 것은 죄의 문제다. 주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설대 에쎕씨 동문모임! 주님의 회초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경고에 교훈을 받는 자리가 되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받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설대에쎕씨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뭐 자랑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이 벌써 그립다.

예레미야 4:19-31

예레미야 4:19-31

전쟁의 함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패전을 전해야 하니 애가 끊을 수 밖에 없다. 재난에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설상가상이다. 온 나라가 황무지가 된다. 머물곳이 없다.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인가? 주의 백성이 주님을 모르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들은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슬기로우면서 좋은(선한) 일을 할 줄 모른다. 사면초가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보이지 않는다. 산을 향해 눈을 들어도 무슨 도움이 오겠는가. 모든 성읍이 주님 앞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주님은 온 땅을 황폐하게 하여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그래도 유다와 예루살렘을 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취소하지는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절망이라면, 완전히 멸망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한줄기 희망이다. 결국 성읍에는 주민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정신을 못차리고 잔뜩 치장을 하고 도와줄 연인을 찾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들은 예루살렘을 경멸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할 것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이, 시온이 망하면서 내는 신음 소리를 이미 들었다고 하신다.

//주의 백성이 주님을 모르는 아이러니! 재난이 설상가상으로 일어나는 이유다.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슬기로우면서 좋은 일을 할 줄 모르니 어쩌랴! 예레미야는 깊른 시름에 애가 끊어질듯 아파한다. 좋은 일은 선한 일이다. 주의 백성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해야 하지 않나? ㅠㅠ 선한 데 지혜롭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도움을 구하려 산을 향해 눈을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화친을 시도해도 소용이 없다. 불순종의 예루살렘을 벌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은 취소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멸망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한줄기 소망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의 신음을 들으신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가는 자가 남은 자다. – 하나님을 향해 신음하라. 그래야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할 수 있다.

예러미야 4:5-18

예러미야 4:5-18

유다에 재앙이 선포된다. 예루살렘이라고 피할 수 없다. 재앙의 때에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온으로 가야 한다. 세계 만민을 멸망시키는 자가 유다 재앙의 선봉에 섰다. 그는 유다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유다의 모든 성읍은 폐허가 되고 주민은 떠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맹렬한 진노에 탄식하며 애통해야 한다. 그날이 오면 왕이 용기를 잃고 지도자들이 낙담하고 제사장들이 당황하고 예언자들도 소스라치게 놀랄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고 속이시곤 칼이 목에 닿게 하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칼보다 훨씬 더 거센바람이 주의 명령에 따라 불어 닥칠 것이라고, 주님이 심판을 선언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유다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에게 구원을 길을 알려주신다. 마음에서 악을 씻어 버리라고 하신다. 적군이 먼 땅에서 몰려와 유다를 에워싸고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이다. 예루살렘이 주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길과 행실이 이런 재앙을 불러왔다고 말씀하신다. 죄악이 주는 아픔이 마음 속까지 파고 들었다.

//주님이 언제 예루살렘은 안전하다고 말씀하셨던가? 시온과 예루살렘은 주의 법과 주의 말씀의 상징인데…백성들이 주의 법과 주의 말씀을 떠났으니 지리적 예루살렘이 시온이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예루살렘은 안전하다’고 속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못 믿은 것이다. 재앙의 때에는 여전히 견고한 성 예루살렘으로 , 시온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이요 시온이다. – 우리가 피할 견고한 성, 곧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나라다. 그러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이 곧 재앙이요, 불순종의 현장이 곧 지옥이다. //그래도 복음은 있다. 마음에서 악을 씻어버리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하신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2:13)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주의 법과 주의 말씀에게로 피해야 한다. 주의 법과 말씀이 있는 곳이 시온이다. 우리가 피할 견고한 성이다.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예레미야 3:19-4:4

예레미야 3:19-4:4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떠나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삼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생가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주를 배신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배신한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을 잊어버린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주님께 돌아오면 변절자라고 하여도, 주님은 그들의 변절한 마음을 고쳐주실 것이다. 그러니 주님만을 하나님으로 모시라고 하신다. 제사가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 만 있다. 결국 주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주 우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주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진심으로 돌아오고 속히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우상을 버리고, 두마음을 품지 않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라고 하신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설 때, 세계만민이 주님을 찬양할 것이고 주님은 주의 백성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주님은 주의 백성에게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갈아 엎고서 씨를 뿌리라고 명령하신다.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악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꺼지지 않는 불처럼 일어나서 우리를 불살라 버릴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 곧 우상에 찌든 결과다. 하나님과 함께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변절자라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은 구원해 주신다. 주님께 돌아온 척만 하는 것은 변절자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하셨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시도록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전통과 관습에 따라 말씀을 읽지 말고),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

예레미야 3:1-18

예레미야 3:1-18

남편에게 버림받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면, 그 여자는 본 남편에게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 하물며 수많은 남자들과 음행을 행한 이스라엘이 어디로 돌아갈 수 있으랴! 문제는 이스라엘은 음행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음행을 하고도 주님을 아버지라고 옛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뻔뻔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말하며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던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음행이 근래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래도 언니 이스라엘이 이 모든 음행을 행한 다음에 주께로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동생 유다도 언니 이스라엘의 변절을 보았다. 그러나 유다도 두려운 줄도 모르고 언니를 따라 음행을 했다. 그것도 주님의 눈 앞에서. 유다도 이스라엘처럼 음행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심지어 유다는 주님께 돌아온 척만하고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은 배신이 신실하지 못함보다 낫다고 하신다.
주님은 주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 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주의 백성이 (이미 망한 이스라엘이) 배신 했지만 자비를 베풀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유다 에게도) 죄를 깨달으라고 하신다. 하나님 대신 다른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깨달았으면 주께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주님이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의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세워 지식과 훈계로 양육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주 앞에 모이면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지 않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서, 포로 잡혀간 곳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신다.

//진심으로 주께 돌아오라고 하신다. 배신이 불신실(불순종)보다 낫다고 하신다. (주께 돌아온 척만 하는 것이 배신보다 더 악함을 강조하신다.) 진심으로 주께 돌아오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게 된다. 진심으로 주께 돌아왔다는 증거가 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