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9-37

예레미야 2:29-37

자기들만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소위 주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께 따질 수 있으랴. 그들은 주님을 배신한 자들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은 사랑의 회초리를 드셨지만 헛수고였다고 하신다. 오히려 옳게 가르치려고 보내신 주님의 예언자들도 그들은 죽여버렸다. 주님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들으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주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주의 백성이 주님을 잊은지 오래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주의 백성이 어느새 음행에 도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죽이고서도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두 주인을 섬기는 그들이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해도, 이집트에 도움을 청해도 수치를 당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의 버림을 받았으니 앗시리아와 이집트를 의지한들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께 돌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돌아올 것은 수치뿐이다. 이것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주님을 배신했고, 주님의 예언자를 죽였고, 주님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고,주님을 잊은지 오래되었고, 음행에 찌들었고, 가난한 자들을 죽였어도, 주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레미야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신다. 끝내 주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고, 그 결국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 수치 중의 수치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는 선고를 받는 것이리라.

예레미야 2:20-28

예레미야 2:20-28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이라는 멍에를 부러뜨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면서 ‘나는 신(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신(하나님)들을 섬기는 음행을 저질렀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사람으로 바뀐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더러워진 몸은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씻어도 씻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남아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핑계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실을 돌아보면 온통 음행뿐이다. 그들은 대놓고 이방 신들을 쫓아다녔다. 그 결과 붙잡혀 온 도둑과 같이, 음행한 이스라엘은 왕으로부터 제사장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까지 수치를 당하였다. 목석의 우상을 보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께는 등을 돌렸다. 환난을 당할 때만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부르짖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섬기는 신(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환난을 당할 때 너희가 좋아 하는 이방 신들이 일어나서 너를 도와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반문하신다. 주님은 유다에게 너는네 성읍의 수만큼 많은 신(하나님)들을 만들어 놓았다고 일침을 놓으신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렸다. 주님의 멍에 대신, 이방 신(하나님)들의 멍에가 가벼울까 쫓아 다녔다. 아버지 하나님 대신 목석의 우상을 부모로 섬겼다. 주님은 벌을 받아야 주님을 버린 것과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19절) 말씀하셨다. 이렇게 환난은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그러나 얼굴만 돌려서는 안 된다. 몸이 주님을 향해야 하고, 발걸음이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방 신들을 향해 버선발로 쫓아나가고, 우상들에게 갈급해 하는, 너도 나도 자기만의 신(하나님)들을 만들어 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피조된 목석의 우상에게서 도움도 안식도 얻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쉴 곳은 주님 한 분이시다.

예레미야 2:1-19

예레미야 2:1-19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쫓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5b)

주님께서 끊임없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얼마나 주님께 성실하고,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어떻게 주님을 따랐는지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주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한 양, 주님을 떠나 헛된 우상을 쫓아다며, 우상들처럼 허무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상들처럼 허무하게 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주님을 찾지도 않게 되었다. 주님이 주신 것들에 감사하지 않고 부정하게 만들었다. 일반 백성은 그렇다처도 제사장들까지도 주님을 찾지 않고, 법을 다루는 지도자들도 주님을 알지 못하며, 통치자들은 아예 주님께 맞서서 범죄하였고, (자칭)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헛된 우상들만 쫓아다녔다고 책망하신다. 결국 주님은 법을 꺼내드신다. 법대로 처리하시겠다고.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 곧 신을 바꾸어 버린 것은 하늘이 놀랄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린 것,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을 찾는 것이 (주님의) 백성이 저지른 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악때문에 이스라엘이 원수들에게 포로로 잡혀가 노예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은 황폐하게 되어,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 되었다. 주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시는데도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결과다. 이스라엘이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정신을 못차리고 이집트로 앗시리아로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주님에게서 돌아선 악에서 돌이키지 않았으니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배신을 징계하실 것이다. 벌을 받아야 주님을 버린 것과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하나님이 다스림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곳이 천국이고, 불순종 하는 곳이 지옥이다. 우상을 따르면 우상처럼 허무하게 (생명이 없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역으로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가(영생을 누리게) 된다. //벌을 받아야 주님을 버린 것과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곧 지옥이다. ㅠㅠ –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살라고 하신다. 우리도 첫사랑을 기억(회복)해야 한다. 늘 주 예수의 신부로 신혼으로 살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1:11-19

예레미야 1:11-19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도배된다. (나의 삶에도 주님의 말씀으로 도배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주님은 예레미야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가지를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살구나무가지를 보고 있듯이, 자신의 약속(말)을 지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주님께서는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지는 것을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진다고 해석해 주셨다. 이 모든 일을 주님께서 친히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유는 사람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밝히신다. 주님은 다른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하고 모든 죄악에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모든 명령을 이 땅의 주민들에게 말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주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예레미야가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치려고 해도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하여 예레미야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먼저 살구나무를 보여주셨다. 예레미야가 본 살구나무 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명확하지 않다.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였을까? 그렇다면 제사장 가문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성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본 살구나무가지가 아론의 지팡이와 상관없어도,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말(약속)을 지켜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주님이 하실 말씀도, 예레미야가 아니라 주님이 지켜내실 것이다.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지는 환상과 같이 주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평화가 아니라 심판과 재앙이다. 그것도 소위 자기 백성에게 임할 재앙이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귀를 막고 (주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자신을 공격해 올 백성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 임마누엘이 구원이라고 하신다. 임마누엘! 주님 편에 제가 서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예레미야 1:1-10

예레미야 1:1-10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6절)

//예레미야가 한 말(1절)을 기록한 책이라고 시작했으면서 온통 ‘주님의 말씀'((2,4,7,8,9절)으로 도배된다. 예레미야의 말은 곧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리다고 말을 하나, 하나님께서는 어리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저 하나님께서 무슨 명령을 내리든지 그대로 말하라고 하신다. 내가 어리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우리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평가대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두려울 수는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함께 하시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친히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고 하나님의 말을 예레미야에게 맡긴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도구는 자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무딘 칼도 주인이 알아서 잘 갈아서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어리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어린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어린이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 잘 못듣고 말도 잘 못하고 잘 못보는 나를 엠으로 사용하신 분은 주님이셨다. 들을 것 듣게 하시고 말할 것을 말하게 하시고 봐야 할 것을 보게 하신 분이 주님이셨다. 오히려 어리니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는 쇠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직도 제 잘난맛에 살려는 나를 심심치 않게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