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4:1-23

시편 94:1-23

복수(심판)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오만한 자, 악한 자, 사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오만하고 악하고 사악한 자들은 주님의 백성을 짓밟으며 괴롭힌다.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들을 살해한다. 하나님을 보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우상의 하나로 치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자들보다 미련한 자들은 없다. 시인은 이들이먀 말로 어리석다고 노래한다.

생명이 없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들으시며 보신다. 생명의 원천이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속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에 청종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신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주님의 소유로 삼아주신다.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살 것이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이들에게 대항한다. 주님은 이들을 도우신다. 변호하신다.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의인이라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환난 날에도 주님의 사랑(인애와 자비하심)이 의인을 붙잡아 준다. 시인의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도 주님의 위로가 시인을 달래 준다.

(그러나) 악인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주님과 어울릴 수 없다. 의인을 해하려고 노리는 악인들에 대항해서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로 피하는 것 뿐이다. 주님이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신), 나의 반석이시다. 악인은 주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 주님은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이다. 망할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시는 사람이야 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을 달게 받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주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주의 백성이 누리는 복이다. 만사형통이 복이 아니라, 임마누엘이 복이다.

시편 93:1-5

시편 93:1-5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의 나라가 영원부터 견고하기 때문이다.
거세게 흐르는 세상의 조류가 우리를 삼키려한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세상의 조류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
그 증거는 주님의 집 마당에 서 있는 나무들이다. 주님은 주님의 집을 거룩한 나무들로 단장하신다.

//거룩한 나무들이 이룬 숲, 곧 의인들의 회중이 하나님의 나라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나라다. 주님은 주님의 집을 거룩한 나무들, 곧 의인들로 단장하신다. 함께 주님의 집에 뿌리 내린 신실한 믿음의 친구들로 인해 감사하다. 나의 삶이 거룩한 나라의 한 부분을 장식함에 감사할 뿐이다. //세상의 조류를 거스릴 힘은 주님의 집 마당에 심어질 때 나온다.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면 뽑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다. //사실 세상 조류가 너무 거세다. 기독교라는 거대 담론은 이미 무너졌다. 그래도 사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버텨야 할 때다. 성도가 형제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나님의 진리가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 힘은 세상조류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시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8편)하고 노래한다. //시인이 주님의 능력의 크고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거센 세상 조류에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도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 주여 나를 구하소서’ 하고 주님을 보게 하소서. 예수께서 즉시 내미시는 손을 붙잡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크고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하소서.

시편 92:1-15

시편 92:1-15

시편 90편을 노래한 시인은 마지막절에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고 두번이나 간구했다. 그런데 시편 92편을 노래한 시인은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92:4)기뻐 외친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손’과 ‘주의 손’, 그 크기가 다름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무리 백세인생을 노래한들, 영원토록 지존하신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에 감사하는 시편기자의 노래는 시편 1편을 떠올린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6/92:9).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다(1:3/92:12-14). 시인은 시냇가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마이라고 더 구체화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늙어도 고목이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물론 하나님의 집 마당이라고 온갖 비바람이 닥치지 않는 곳은 아닐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해와, 밤에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91편에서 노래했듯이 사면초가의 재앙이라도 하나님의 집 마당에 있는 시인을 해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집 마당에서는 ‘사람이 낸 꾀’ 대신에 정직함, 정의와 공의가 선포된다. 내 ‘꾀’ 대신 정의와 공의가 선포되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 마당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 곧 하나님의 나라다. 주님의 손이 행하시는 곳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시편 91:1-16

시편 91:1-16

주님께서 시인에게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며,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시인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며 노래한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
주님은 나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건져주시는 분.
주님은 주님의 깃으로 나를 덮어주시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나를 품어주시며, 나를 지켜 주는 방패와 갑옷이 되시는 분.
나는 밤의 공포도 낮의 화살도 무서워하지 않으리.
흠암의 염병도 백주의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나에게는 재앙이 없으리. 오히려 악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가장 높으신 분이신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으니,
나에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으리, 나의 집에는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으리
주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나의 가는 길을 지켜주시리
오히려 사자와 독사들을 짓밟과 다니게 하시리.

주님께서 시인의 노래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신다.

시인이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구원하겠다.
시인이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주겠다.
시인이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시인을 건져주고 (구원하고) 시인을 영화롭게 하겠다.
내가 시인을 만족할 만큼 오래 살도록 하고 주님의 구원을 시인에게 보여 주겠다.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어도 환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한 분이라고 노래한다. 주님과 함께 있어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는 것이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듯 임마누엘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오히려 천사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이긴다.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자 담대해 진다. 이런 시인을 주님은 구원하신다. 구원이라 주님과의 교제다. 임마누엘이란 주님과의 교제다. 주님을 부를 때 주께서 응답하시고, 고난 날에 주님이 함께 해 주심이 구원이다. 바울의 교훈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구원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8/30/

시편 90:1-17

시편 90:1-17

시인은 주님이 우리의 거처였다고 노래한다. 임마누엘! 창조주 하나님, 시간 너머의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가 죄를 숨기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환히 드러난다. 주님이 우리 죄에 대해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진다. 인생 칠십년 팔십년 살아도 수고와 슬픔뿐 아닌가? 그것도 주마등처럼 쏜살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 찰라라는 것을 안다면, 심판의 그날이 도둑이같이 온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다면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희노애락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괴로움은 주님 안에서만 즐거움으로 바뀐다. 이 임마누엘의 즐거움이야 말로 자자손손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 할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노래를 마무리한 것처럼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주님의 은총이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견고/영원 하려면 주 안에 있어야 한다. 주님을 우리의 거처로 삼아야 한다. ‘모사인재 성사재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