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3:23-40
가까운 곳의 하나님과 먼 곳의 하나님. 무슨 뜻일까? 무소부재라는 뜻일까?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주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고 주님이 진노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느라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다. 헛된 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몄다. 주님은 주님의 말을 받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만 전하라고 명령한다. 알곡은 쭉정이가 아니라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은 준엄하다.
주님은 거짓 예언자들의 대적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거짓말로 주의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을 원수 삼으신다. 주님은 결코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들은 주의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다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들이 주님께 부담이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백성과 그 집에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는지 되묻고 청종하라고 하신다. 더이상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부담스러운 말씀’을 (새번역), 개역개정은 ‘엄중한 말씀’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짐스러운 말씀’으로 번역한다.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면,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을 짐으로 여기시고 버리신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니다. 편하고 가볍다. 내 짐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지는 것이 안식이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 황송함을 부담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이 부담스러운 것은 주님 앞에 나의 연약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도 주님의 눈을 피할 수있는 곳은 없다. 멀리 떠나 있으면 (다른 신들을 섬기면) 주님의 대적이 된다. 그렇다면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주님편에 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