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5:30-38

예레미야 25:30-38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그 땅이 폐허가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압박하는 자의 칼에 의해서, 내면적으로는 주님의 분노 때문에, 총체적으로는 주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돌리시는 거부할 수 없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돌이키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이게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요나 때, 니느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매달리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한다면, 당연히 이웃에게 인자해야 한다. 보이는 형제부터 사랑해야 한다. 요한은 첫번째 편지 3:14에서 성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유를 ‘형제사랑’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사랑이 없는 곳에 계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사실 유다 백성이, 뭇 민족이 주님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는 이 말씀에 의지해서 원망과 불평의 백성들을 위해 몇번이고 중보했다. 요엘도 요나도 이 하나님을 알았다. 시편의 시인들도 이 구절로 노래했다. 하나님의 선포에 반응해야 한다. 주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떠나가신다. 주님의 부재가 지옥이다.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예레미야 25:15-29

예레미야 25:15-29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손에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 뭇 민족에게 마시게 하라고 명하신다. 뭇 민족이 포도주를 마신 후, 주님은 그들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먼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주민들에게, 그 땅의 왕들과 고관들에게. 그래서 그 땅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의 놀라움과 빈정거림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신하와 고관과 그의 모든 백성과 이집트에 사는 여러 족속과 우스 땅의 모든 왕과 블레셋 땅의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의 주민과 아스돗에 남아 있는 주민과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두로와 시돈과 지중해 건너편 해안지방의 왕들과 드단과 데마와 부스의 주민과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짧게 깍은 모든 족속과 아라비아, 사막, 시므리, 엘람, 메대의 모든 왕과 북쪽의 원근 각처의 모든 왕에게 주님의 포도주 잔을 주어서 차례로 마시게 했다. (이 모든 민족에게 주님의 말씀을 예언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세삭 왕에게도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주님은 이 모든 민족 사이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모든 민족은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쓰러져서 죽을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하신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재앙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뭇 민족들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뭇 민족 사이에 전쟁을 일으켜서 모든 주민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진노의 포도주 잔을 전하라. ‘진노의 포도주 잔’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거부할 수 없는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레미야는 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예루살렘과 유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야 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전하는 것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예레미야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러나 요나가 달아났던 이유가 니느웨를 향한 진노의 소식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바뀔 것이 뻔하였듯이, 예레미야가 전하는 진노의 포도주 잔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기지 못하니 복음이 된다. 다만 니느웨 사람들이 그랬듯이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도 불순종하면 재앙이 내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도 무사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람의 힘만으로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대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신 예수를 알아야 한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 뿐이다. 임마누엘은 우리가 전해야 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복음으로 바꿔준다.

예레미야 25:1-14

예레미야 25:1-14

주님은 요시아 때부터 줄기차게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 제 사년에도 말씀하셨다. 요시야 왕 십삼년부터 이십삼년동안 계속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주님은 유다 백성이 끊임없는 악한 삶과 온갖 악행을 그치고 주님께 돌아와야 약속의 땅에서 길이길이 살 수 있다고 하셨다.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곧 우상을 섬겨서 주님의 분노를 격발시키지 않아야 주님도 쟁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결국 주님은 재앙을 보내셨다.
그래도 주의 말씀을 듣지 않자, 주님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보내셨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과 그 주위의 모든 민족을 치셨다. 주님은 불순종의 그들을 완전히 진멸시켜, 그들을 놀람과 빈정거림과 조롱거리로 삼으시고 이 땅을 영원한 폐허로 만드시겠다고 하신다. 이 땅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땅은 폐허가 되고 이 땅에 살던 민족은 칠십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을 섬길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칠십년이 다 차면, 주님은 바빌로니아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바빌로니아도 쳐서 그곳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의 말씀도 성취될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많은 강대국들과 대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행하고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애굽 정책을 펴다 죽은 요시아 왕과 달리 여호야김 왕은 친애굽 정책으로 돌아서야 했다. 주님께로 돌아서야 하는데 방향이 잘못되자, 주님은 바벨론이라는 새 칼을 꺼내드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돌아서야 할 곳은 주님 한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 결과, 유다는 강대국 틈에 끼어 망국의 길을 걷는다. 바벨론도 의지할 나라가 아니다. 망할 나라다. 세상에 의지할 곳은 없다. //믿음의 길은 이 세상에서 강한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세상 풍파에 시달려도 주님과 함께 함이 (영원한) 복이다. 임마누엘! 길이길이 하나님을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예레미야 24:1-10

예레미야 24:1-10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신다. [성전 앞에 무화과 광주리 두 개가 놓여 있다. 한 광주리에는 맏물 무화과, 곧 아주 좋은 무화가가 담겨 있고, 다른 광주리에는 먹을 수도 없는 아주 나쁜 무화가가 담겨 있다.]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무엇이 보이는지 물으셨다. 예레미야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각각 담긴 두 광주리가 보인다고 대답했다. 주님은 좋은 무화과 광주리는 바빌로니아 사람의 땅으로 끌려가 유다의 포로들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지켜보시고 형통하게 해서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그들의 하나님(신)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유다왕 시드기야와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과 이집트 땅으로 피난 간 사람들은 나쁜 무화과처럼 만들어 버리겠다고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계 만국으로 흩어지고 혐오의 대상, 수치와 조롱거리, 비웃음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이 진멸하기까지 그들에게 전쟁과 기근과 염벼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알곡과 쭉정이가 다르듯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가 다르다. 광주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광주리에 담긴 내용물이 다르다.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살라 버리듯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는 다른 광주리에 담긴다. 나누는 사람은 주님, 하나님이시다. 더 좋은 광주리에 담긴 무화과가 복된 것이 아니라, 좋은 무화과가 담긴 광주리가 복되다. 좋은 무화과는 순종의 백성이요, 나쁜 무화과는 불순종의 백성이다. 포로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크고 넓은 집에 살아도, 하나님보다 힘있는 친구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좋은 무화과의 조건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성령께서 순종할 힘을 주신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하다. 임마누엘!

예레미야 23:23-40

예레미야 23:23-40

가까운 곳의 하나님과 먼 곳의 하나님. 무슨 뜻일까? 무소부재라는 뜻일까?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주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고 주님이 진노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느라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다. 헛된 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몄다. 주님은 주님의 말을 받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만 전하라고 명령한다. 알곡은 쭉정이가 아니라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은 준엄하다.
주님은 거짓 예언자들의 대적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거짓말로 주의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을 원수 삼으신다. 주님은 결코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들은 주의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다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들이 주님께 부담이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백성과 그 집에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는지 되묻고 청종하라고 하신다. 더이상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부담스러운 말씀’을 (새번역), 개역개정은 ‘엄중한 말씀’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짐스러운 말씀’으로 번역한다.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면,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을 짐으로 여기시고 버리신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니다. 편하고 가볍다. 내 짐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지는 것이 안식이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 황송함을 부담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이 부담스러운 것은 주님 앞에 나의 연약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도 주님의 눈을 피할 수있는 곳은 없다. 멀리 떠나 있으면 (다른 신들을 섬기면) 주님의 대적이 된다. 그렇다면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주님편에 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