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1-14

예레미야 21:1-14

시드기야 왕은 바스훌과 스바냐 제사장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에게 보내, 제발 유다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포위하고 있으니,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것처럼 느부갓네살이 물러가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에게 주님께서 친히 유다를 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성 안에 있는 것을 다 치시겠다고 하신다. 큰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유다 왕 시드기야와 전염병에서 살아 남은 자는 느부갓네살의 칼에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생명의 길과 사망을 길을 제시하신다. 성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요, 갈대아 사람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잡혀가겠지만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께서 얼굴을 예루살렘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이 손에 넘어가 불살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화를 내리시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아서다. 정의롭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하신다. 주님이 오히려 그들의 대적이 되신다. 주님은 행위대로 벌하시는 분이시다.

//정의가 없는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주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도 따른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벌을 받지 않겠다고 (물리적) 성 안에 남아 있으면 사망이라고 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바란다면 세상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먼저 순종하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20:7-18

예레미야 20:7-18

예레미야는 주님께 속았다고 말을 한다. 주님과 게임해서 져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소연 한다.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치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받는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주님의 말씀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전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고발한다. 예레미야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본다. 예레미야는 주님께 의지한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실패할 것이고 주님 앞에서 큰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주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심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그래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을 미리 찬양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할 정도로 수모를 받는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간구한다.

//주님께 속는다는 것이 성립될까? 주님과 게임해서 이길 수 있다는 가정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주님을 안다. 다만 사방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뿐이니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의지할 바는 주님밖에 없다고 말한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존재할 의미가 없다며 자신의 출생까지 저주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간구한다. //주님께 속지 않는 방법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다. 주님과 맞짱을 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주님 편에 서서 게임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기는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주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듯, 나도 부끄러움 너머에 있는 면류관을 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7/10/27/

예레미야 19:14-20:6

예레미야 19:14-20:6

마골밋사빕

‘마골밋사빕’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성전총감독이었던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준 이름이다. 바스훌은 도벳에서의 예언을 성전들에서도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 칼을 채우고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예레미야는 갇혔다가 풀려났는데,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바스훌 (자유)에게는 역으로 마골밋사빕 (포로) 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마골밋사빕’은 문자적으로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사면초가’라고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라고 주를 달았다. 공동번역의 ‘사면초가’가 적절한 번역인 듯 하다.

// 사면초가는 초왕 항우가 한왕 유방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진퇴양난’을 너머 사방에서 에워쌈을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런데 초왕 항우의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리는 데, 적군의 노래(함성) 소리가 아니라 아군의 노래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데 사면초가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사방에서 초나라 병사들이 부르는 초가 소리의 의미를 항우는 알았다. 항우는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포로가) 저렇게 많은고?” 하며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역발산(혜)기개세’라는 해하가를 남기고 마지막전투에서 자결한다. 그때가 31세의 나이라 한다.

바스훌에게 주어진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은 자유자 바스훌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한 것이다. 사방으로 에워싸는 것이 바벨론 군대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다. 성밖 도벳에서, 성안 성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면 돌이켜야 하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사면초가 상황이다. 사실 우리를 에워싼 대적이 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평안의 메세지, 긍정의 신앙이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들리는 것이 문제다. 돌이켜야 할 때다. 주께로 돌아가야 할 때다.

https://quietwaters.blog/2017/10/26/

예레미야 19:1-13

예레미야 19:1-13

주님께서 예레미애에게 토기 항아리를 사서 백성의 대표, 장로와 제사장 몇 사람을 데리고 ‘하시드 문’ 어귀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리’로 가서 다음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나 만군의 주가 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릴 것이다. 무서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남의 나라처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겼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가득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을 세워 내가 상상조차도 해 본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그날이 오면 이곳을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나 주의 말씀이다.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계획을 좌절 시킬 것이다. 전쟁에서 원수들의 칼에 찔려 죽게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 도성을 폐허로 만들 것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원수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빠져 자식들을 이웃들을 서로 잡아먹을 것이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이같이 말하고 함께간 백서으이 대표들 앞에서 가지고 간 항라리를 깨뜨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하셨다. [만군의 주가 말한다. 토기 그릇은 한 번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다. 나도 이 백성과 이 도성을 토기 그릇처럼 깨뜨려버리겠다. 내가 이곳과 여기 사는 주님들을 시체로 만들어 놓겠다. 도벳까지 시체를 묻게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궁들이 모두 도벳이 터처럼 불결하게 될 것이다. 이방 신들에게 술을 부어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주님은 더러워진 항아리를 깨신다. 씻어 쓸 수 없는 항아리를 깨뜨려버리신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옹이는 깨끗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만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또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에 쓰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에게 쓸모있는 그릇으로 바쳐져서 모든 좋은 일에 쓰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하찮은 질그릇 옹이에 비유하신다. 그런데 더럽혀졌다. 그러니 깨뜨려버릴 수 밖에 없다. 금그릇과 은그릇은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른 그릇르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지만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오염되면 버려야 한다. 유다의 상황이 이랬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우리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가졌다고 교훈한다. 우리에게 있는 악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교훈한다. 질그릇인 우리가 깨뜨려 버려지지 않을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한다.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7/10/25/

예레미야 18:13-23

예레미야 18:13-23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인데, 신랑과 신부의 관계인데, 주님의 신부 이스라엘은 너무 역겨운 일을 저질렀다. 신랑이신 주님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헛된 우상을 섬겼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이정표도 없는 길로 들어섰다고 표현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사는 땅을 황폐하게 만드실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하실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재난을 당할 것이고 주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예레미야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예레미야가 없어도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고, 주님의 말씀을 전해 줄 예언자가 있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하는 말을 무시하자고 공모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백성들을 원수삼는다. 저들이 자신의 선을 악으로 갚는 꼴이라고 주님께 호소한다. 그럼에도 그들을 주님 앞에서 변호하고 주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고 노력하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드디어 배은망덕한 그들이 전쟁에서 죽기를 간구한다. 그들에게 약탈자들을 보내달라고 간구한다. 주님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의 흉계를 이미 알고 계시니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그들의 허물을 가볍게 다루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다. 주님의 진노에 그들이 주님 앞에서 거꾸러져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주님의 진노는 어떻게 해서라도 주의 백성을 돌이키려는 도구다. 역설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불러오는 방편이다. 그런데 주의 백성이 주님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헛된 우상을 섬겼다. 주님은 이렇게 딴 길로 가는 유다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예레미야가 주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자,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른 제사장, 다른 지헤자. 다른 예언자가 있다고 당당히 말하며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하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꼴이다. 주님을 잊어버렸으니 주님이 보내신 자를 분별하지 못한다.ㅠㅠ //예레미야는 주님의 선언대로 불순종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더 이상 말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모양이다. 이제는 주님의 진노만이 불순종의 백성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