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2:41-53

열왕기상 22:41-53

북이스라엘 아합 왕 4년에 남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이 아사를 이어 왕이 되었다. 서른 다섯에 왕이 되어 이십오 년 동안 다스렸다. 여호사밧도 아버지 아사와 같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그러나 딱 아버지 만큼이었다. 신당만은 헐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과 평화롭게 지냈다. 여호사밧은 남창들을 그 땅에서 쫓아냈다. 당시 에돔에는 왕이 없었고 유다 왕이 총독을 파견해서 다스렸다. 여호사밧은 오빌에서 금을 가지고 오려고 다시스 선단을 만들었으나, 그 배들이 파선했다. 이것을 기회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동업을 제의했지만 여호사밧은 거절했다. 여호사밧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 17년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는 2년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리게 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은 길과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바알을 섬기고 그것에 절을 하여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했다. 

//남유다 여호사밧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주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2)북이스라엘과 평화롭게 지냈다. 3) 남창을 쫓아냈다. 4)에돔에 총독을 파견해서 다스렸다. 5)다마스 선단이 파선을 했어도 북이스라엘과 경제적으로 손을 잡지 않았다. 방법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여호사밧은 주님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꽤 영화를 누렸다. //반면 북이스라엘 아합과 아하시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합이 잠시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지만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았다.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을 알아갈 기회들을 번번히 놓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였던 마음마져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역시 아합과 이세벨을 따랐다. 그 결국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가문의 멸절로 끝난다. ////누구의 인생에나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느냐? 에 따라 인생의 종착역이 달라진다.

열왕기상 22:29-40

열왕기상 22:29-40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시리아와 싸우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아합은 변장을 하고 싸움터로 나갔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나갔다. 시리아 왕은 32 지휘관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만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당연히 왕복을 입고 나온 여호사밧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착각하고 집중공격 했다. 여호사밧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고, 그들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알고 더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한 군인이 무심코 쏜 화살이 이스라엘 왕에게 명중했다. 화살이 갑옷 이음새를 뚫고 들어가 아합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싸움터에서 빠져나가길 원했지만 싸움이 워낙 격렬하여 병거들 사이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죽었다. 해가 질 무렵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들려왔고, 이스라엘 유다 연합군은 이렇게 퇴각하였다.

아합은 전장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그 주검을 사마리아로 가지고 와서 묻었다. 사마리아 연못에서 아합의 병거와 갑옷을 씻을 때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핧았다. 창녀들이 목욕을 하는 연못이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아합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사관은 이번 싸움에서 벤하닷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 시리아 왕이라고 한 번 언급할 뿐이다. 이번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싸움이요, 곧 아합과 벤하닷의 3차전이지만, 영적으로는 길르앗 라못으로 치러 올라가지 말라는 주님의 뜻과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는 아합간의 싸움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사관은 이번 전쟁을 아합의 죽음과 북이스라엘 남유다 연합군의 자발적? 퇴각으로 끝맺는다.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마치셨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가 매일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열왕기상 22:15-28

열왕기상 22:15-28

미가야가 아합 앞에 섰다. 아합은 우리가 길르앗 라못을 치러 올라가는 것이 좋은지 마가야에게 물었다. 마가야는 주님이 길르앗 라못을 왕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니 올라가라고 대답했다.  아합 왕은 진실되게 대답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가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목자 없는 양 떼와 같은데 주님이 인도자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각기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마가야는 이렇게 자신에게 흉한 것만 예언한다고 말했다. 마가야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주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으로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주님이 아합에게 이미 재앙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합의 예언자들 중 시드기야가 다가와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주님의 영이 어떻게 자신에게서 미가야에게 건너가 미가야가 예언하게 되었는지 따졌다. 미가야는 시드기야가 골방으로 들어가 숨는 바로 그날에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자신이 승전하고 개선할 때까지 빵과 물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라고 명령했다. 미가야는 아합이 평안히 돌아올 수 있다면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예언을 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말을 잘 기억해 두라고 말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 핍박의 떡과 물이다. 그러나 말씀의 성취로 미가야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이 하나님이 차려주실 밥상으로 변할 것이다. //거짓말 하는 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허락하신다.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영에게 속기 마련이다. 장로/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시드기야 꼴이 날 수 있다. 평소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되어야 한다. 평소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열왕기상 22:1-14

열왕기상 22:1-14

벤하닷이 아합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보다. 3년이 지나가건만 시리아에게 빼앗겼던 땅을 돌려받지 못했다. 때마침 남유다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합을 방문했다. 둘은 사돈관계다. 아합이 하나님께 굴복하자 남북관계가 좋아졌나보다. 사관이 또 아합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 왕이라고 적은 것을 봐서도 그렇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함께 시리아를 치자고 했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자고 말했다. 아합은 400명 가량의 예언자들을 모았다. 그들은 모두 아합의 원대로 시리아를 치러 올라가라고 말했다. 주님이 길르앗 성을 넘겨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호사밧은 꼭집어 /주/님/의/ 예언자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아합은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지만 미가야는 자신에게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대꾸했다. 아합은 하는 수 없이 미가야를 불렀다. (둘의 예언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달랐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이 사백여 예언자 중 시드기야가 철뿔을 가지고 나와서 아합에게 주님이 이 철뿔을 가지고 대적이 모두 파멸될 때까지 그들을 찌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다른 예언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시드기야의 예언에 동조했다.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같이 이스라엘 왕의 승리를 예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다고 대답했다. 

//아합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벤하닷과의 연장전을 불사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지난 두 번의 싸움에서 배웠음에도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하나님 대신 사돈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합은 사돈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언자들에게 물었다. 그것도 전쟁을 당연시 하고 물었다. 아합과 함께 한 사백 여 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로 판명난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함부로 예언할 수 없다. 사람들이 거짓 예언을 감히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니, 결국 저들은 하나님을 생명이 없는 우상과 동일시 한다. 헛것에 불과한 우상이 무엇을 어쩌랴. 그러니 거짓 예언자들은 듣기 좋은 말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예언자는 다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한다.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모든 전쟁은 시작한 쪽이 잘못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명하신 전쟁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주님은 개인관계뿐만 아니라 민족간에도 할 수 있다면 화평하기를 원하신다. 우크라이나 러시안 전쟁도 하마스 이스라엘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모사재인 성사재천’을 모르니 애꿎은 백성들만 고통을 당한다. 전쟁대신 사랑이 평화가 임하게 하소서.

열왕기상 21:11-29

열왕기상 21:11-29

나봇이 살고 있는 성 안의 원로와 귀족들은 (아합의 이름으로) 이세벨이 편지에 쓴 그대로 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쓴 그대로 했었다면…ㅠㅠ 이렇게 나봇은 죽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이세벨은 아합에게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알렸고 아합은 얼타꾸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다.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말씀하신다. 살인을 하고 도둑질한 아합에게 사형을 언도하신다. 아합은 엘리야를 원수라고 부르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생명을 재촉하느냐고 대꾸했다. 그리고 아합(오므리)가문이 여로보암, 바아사의 가문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멸절 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모든 일을 사주한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찢어먹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도 전했다.

사관은 아내의 충동으로 자기 목숨을 팔아먹은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이세벨의 충동질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혐오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였다.

아합은 때늦은 회개를 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다. 아합이 겸손해 졌으니 아합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아합의 아들 대에 가서 아합의 가문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원로와 귀족들이 이세벨 (아합)의 악에 동조한다.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이미 악한 것이다.//나봇의 죽음에 무감각한 사람들.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신음한다. 살인과 도둑질은 십계명을 전부 어겼다는 것을 대표한다. 하나를 어겨도 사형이니 아합 집안에 내려진 사형언도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아합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내린다. 집행유예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내리는 때다. 아합이 하나님이 주인줄 진작에 알았다면,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했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주님께 항복했다면…ㅠㅠ 아합의 때에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저주가 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복의 자리에 나아가는 데 늦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