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1-10 (상한 마음)

열왕기상 21:1-10

상한 마음

‘근심하고 답답하여’ 예언자가 벤하닷을 놓아준 것이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화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아합의 반응이었다. (20:43)

아합은 나봇이 포도원을 조상의 유업이기 때문에 양도하기를 거절하자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왔다.(21:4)

그런데 이세벨에게는 아합의 답답함은 안보이고 근심거리만 보였다.(21:5)

새번역은 모두 ‘마음이 상했다’고 번역하는데, 개역개정은 아합의 경우에는’근심’과 ‘답답’ 두 단어로, 이세벨의 눈에는 ‘근심’만 보였다고 기록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바일 앱 사전에서 조사하면 근심과 답답의 히브리어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어 용례를 살펴볼 수 없었다. 다만 아합의 마음이 상한 것을 근심에 답답함이 더해졌다고 기록하는데는, 아합의 답답함은 나봇이 거절의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명령)을 언급했기 때문에 생긴 근심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반면 이세벨은 아합에게서 세상 근심, 곧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해서 생긴 근심만 보았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대처하고야 만다. 만약 아합 자신이 근심보다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섰다면 아합은 좀 더 심사숙고 했을 것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려는 욕심에서 돌이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세벨은 아합의 세상 근심만 해소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사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성도라고 현실에서 하나님께 울분을 토로할 때가 없을까? (소위) 신앙이 좋다는 성도들도 자녀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나 자신 혹은 가족의 질병과 도산으로  하나님께 답답함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호소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답답함이 있다면, 자비하신 (위로의)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