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4 (1-25)

욥기 24 (1-25)

욥은 하나님께서 심판날을 정해 두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하다.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사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 많다. 한쪽에서는 기름도 포도주도 풍부해도,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목말라 한다. 성읍 안에 상처 받은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 해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시는 것 같다. (욥은 자신과 같이 이유도 알지 못하고 고통받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고 말한다.)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빛이 밝혀 주는 길로 가지 않는다. 살인과 착취와 도둑질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밝은 한낮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들은 한낮을 무서워하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홍수에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죄인들은 지옥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악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곧 악인들에게 사형을 언도하시면 그들이  생명을 건질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안정과 평안을 주시는 듯 하지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피신다. 악인들은 잠시 번영하다가 곧 사라진다.

//욥은 자신과 같이 이유도 알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고통받는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 빛이 밝혀 주는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통 받는 자들이 죄를 지어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자들이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낮은(온유한) 자들)을 구원하시지만,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이 생명을 건질 길은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강한 자들이 누리는 안정과 평안은 잠시고, 하나님과 잇대어 사는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기 23 (1-17)

욥기 23 (1-17)

엘리바스의 여전한 정죄는 욥을 억누르기만 한다. 욥은 죄가 없어도 고통 받기도 한다는 사정을 이해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당한 고통의 이유를 듣고 싶어한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자신을 정죄로 억누르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확신한다. 그런데 자신을 무죄라고 선고해 주실 주님이 침묵하신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시는 주님이 자신의 무죄를 아시면서도 왜 무죄를 선고해 주시지 않는지 묻는다. 욥은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은 주님이 자신을 두고 이미 세우신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다만 욥이 자신을 향한 주님의 계획을 온전히 알 수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욥은 자신이 두려운 것은 어둠(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욥의 두려움은 빛되신 주님을 온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욥의 믿음은 확고하다. 자신의 계획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 다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욥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두렵다고 노래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해 보시면 정금 같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다. 

욥기 22 (1-30)

욥기 22 (1-30)

엘리바스의 세번째 타석. 세번째 타석이면 투수의 구질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데… 엘리바스는 여전히 욥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감독이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ㅠㅠ

엘리바스는 욥의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시겠느냐고 묻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욥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배앗아 헐벗게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없는 죄까지 만들어 씌운다. 나아가  욥이 권세를 이용해 갑질을 했으며 과부와 고아를 돌보기는 커녕 학대했다고 고발한다. 하나님께서 욥의 이같은 잘못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악한 욥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악한 자가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의로운 자들은 악한 자들이 형별을 받을 때 기뻐한다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제라도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욥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고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겸손하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온갖 불의한 것을 내버리라고 조언한다. 하나님만 보물로 삼으라고 말한다. 하나님만이 기쁨의 근원이심을 알라고 말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욥의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욥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욥도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자가당착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 욥의 친구들이 자신들은 스스로 죄없다고 자신하는 것부터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 누가 겸손한가? 겸손은 (낮아짐이 아니라) 낮음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겸손에 가깝고 예수께서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누리려면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을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지 자문해 본다. 과연 악한 자들이 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악한 자들이 용서받는 것에 환호성을 질러야 한다. 우리 역시 죄와 허물에서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벌받는 것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멀리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셔서 깨끗하게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욥기 21:17-34

욥기 21:17-34

욥은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없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에게 재앙이 닥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 당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적어도 시편 1편 시인이 노래하듯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야 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보기 힘들다. 

욥은 친구들이 자식들의 죄로 욥이 고통받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연좌제를 적용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위에 앉을려고 하지 말라고 소발에게 대답한다. 욥은 세상 지혜로 자신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세상을 두루 다녀 본 사람의 말을 전한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 남는 사람은 악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예외가 가득한 세상을 인간의 지혜로 풀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교만이다. 욥은 친구들의 교만을 지적한다. 세상을 두루 다녀보았다면 세상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수두룩 하다고 지적한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을 어찌 이해하랴. 

정병오 묵상글 (20231127)

욥기 21장 17-34절을 읽으며

욥은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니 욥은 악인이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는 친구들의 논리를 본격으로 공격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악인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흥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친구들은 악인이 그 생애에 벌을 받지 않더라도 그 자손이 벌을 받게 된다고 하자 욥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결국 욥은 친구들이 권선징악의 원리가 이 땅 가운데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을 친구들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이 원리를 교조적으로 붙들고 있음을 지적한다. 욥의 친구들이 정말로 욥을 괴롭히기 위한 의도로 이 원리를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원리에 허점이 있음을 알고도 고집하며, 욥이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욥이 큰 죄를 지었다고 확신함으로 거짓을 행했고 욥의 괴로움을 더한 것이 사실이다.

의도가 없더라도 신념이 과도할 경우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거짓을 행하게 될 수 있다. 주의할 일이다.

욥기 21:1-16

욥기 21:1-16

소발의 말에 욥이 대답한다. 친구들에게 자신을 위로하려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한다. 자신을 정죄하는 대신 자신의 말을 그냥 들어주면 그것이 자신에게 유일한 위로가 된다고 말을 한다. //진정한 위로는 공감이다.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들어줘야 한다. 이 당연한 것을 잘 못한다. 맨스플레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욥은 자신이 처한 곤경에 친구들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욥 자신에게도 떨리고 소름끼치는 일이라고 시인한다. 욥은 악한 자들이 아무런 재난도 없이 장수하며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생을 마감한다고 말한다. (소발의 말과 달리 악인들이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심지어 후손들까지도 잘 산다.) 물론 욥은 악한 자들의 결국은 지옥행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욥은 이런 악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악인들이 이땅에서 마땅한 벌을 받지 않기도 하듯이,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자신의 고통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욥은 대답한다. 이땅에서는 온통 예외 투성이다. 진정한 심판은 죽은 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 잇대어 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