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1-26

욥 3:1-26

극심한 고통가운데 말로 죄를 짓지 않던 욥이 입을 열었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하면서 울부짖는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태어나지 않고 바로 죽었더라면 바로 안식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욥은 죽음 너머 악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는 곳, 삶에 지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 갇힌자들도 평화를 누리고, 노예를 부리는 감독관이 없는 곳,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별이 없는 곳, 종까지도 자유를 얻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욥은 태어나서 고난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보물을 찾기보다 죽기를 더 바라는 마음이라고 노래한다.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고 노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욥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쉼을 얻는다. 갇힌자들도 평화를 누린다. 노예를 부리는 감독관이 없으니 노예제도가 없는 곳이요, 착취가 없는 곳이다. 빈부귀천도 없고 지위고하의 차별이 없다. 종들이 자유를 얻는 곳이다. 욥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고대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욥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다스림. 인생의 희노애락애오욕을 쥐락펴락 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참 생명이요 가장 중요한 보물이다. 그런데 지금 욥은 이 보물을 찾는 것 대신, 죽는 것이 낫다고 노래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평화도 안정도 안식도 사라졌다고 노래한다. 흠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사귐이 없는 짝사랑이라면… 사탄의 작업이 통하는 것일까? 욥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다. 욥은 천상 회의를 상상조차 못한다. 그러니 욥이 장고 끝에 ‘내 탓이오’ 하고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편으로는 욥이 하나님의 부재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초대하는 애통이기도 하다. –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한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고난의 날들이 오히려 임마누엘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