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5:1-27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정죄는 계속된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ㅠㅠ 심판/정죄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주님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죄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죽음과 패가망신을 죄 때문이라고 자신이 본대로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고난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말한다. (왜 욥에게만 적용할까?) 그러니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 사정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친다. 창조주 하나님 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면서도, 간교한 사람의 계획은 꺾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욥을 낮은 자도 슬퍼하는 자도 아닌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로, 교활한 자로 몰아간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욥을 그저 불의한 사람으로 낙인 찍고야 만다. 위로라고 한답시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전능자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한다. 6전7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맞는 말을 다시한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고통이 주님의 훈계니 달게 받으라고 말한다.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정죄는 계속된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ㅠㅠ 심판/정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주님의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엘리바스의 말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니 문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마치 자신은 욥보다 의롭다는 태도다. 가난한 자의 복과 애통하는 자의 복을 말하면서도, 온유(겸손)한 자의 복을 쏙 빼고 욥을 아예 죄인 취급을 해버린다. 예수님은 죄인들도 친구삼지 않으셨던가? 나의 간증과 깨달음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간증과 깨달음을 욥에게 잘못 적용했다. 자신의 안정에 도취되어 하나님(심판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니 욥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욥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다. 말의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지난 일주일 동안처럼 함께 애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