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6:1-30

욥 6:1-30

엘리바스의 정죄에 욥이 대답한다. 욥은 말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 이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육신의 고통 때문이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받는 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을 밝히 알기를 원했다. 주님이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시고, 주님이 자신을 부수고 깨뜨리셔도 주님의 뜻을 밝혀 주시면 그것이 위로가 되고 오히려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욥이 지금 당한 사정은 딱하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절망속에서 허덕일 때 필요한 것이 친구다. 그런데 세상 친구들은 미덥지 못하다. 욥도 친구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엘리바스의 정죄에 실망하고 만다. 그리고 친구의 위로를 기대했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재산을 구걸하지도, 목숨을 애걸하지도 않았다. 그저 위로받기 원했을 뿐이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고소하라고 묻는다. 무엇으로 자신을 책망하는지 따진다. (11-25)

욥은 입을 열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 것은 절망에 빠지 자신의 상황을 말한 것이요, 바람과 같이 마음에 담을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야 말로 친구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친구라면 얼굴을 맛대고 거짓말은 하지 못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친구라면 자신의 정직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악한 행위는 고사하고 옳지 않은 말이라도 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26-30)

//극심한 고통가운데, 자신의 출생마저도 저주했던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악한 행동도, 심지어 옳지 않는 말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친구라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도전한다. 자신은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 떠났다는 평가에 부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이상 친구들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으니, 주님이 자신의 목숨을 취해 가시면 오히려 그것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냥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태도가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을 대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주님의 소유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당장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마저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셨다. 예수께서 말한 친구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한 자들이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셨으니,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친구도 믿음의 가족이다. 주님만이 나의 위로가 되신다. 주님의 말씀만이 나의 위로가 되신다. 나에게는 참 친구가 되신 주님이 계심을 감사하는 아침이다. 그러면 나는 좋은 믿음의 가족/친구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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