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 (1-30)

욥기 22 (1-30)

엘리바스의 세번째 타석. 세번째 타석이면 투수의 구질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데… 엘리바스는 여전히 욥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감독이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ㅠㅠ

엘리바스는 욥의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욥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시겠느냐고 묻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욥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배앗아 헐벗게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없는 죄까지 만들어 씌운다. 나아가  욥이 권세를 이용해 갑질을 했으며 과부와 고아를 돌보기는 커녕 학대했다고 고발한다. 하나님께서 욥의 이같은 잘못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악한 욥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악한 자가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의로운 자들은 악한 자들이 형별을 받을 때 기뻐한다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제라도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욥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고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겸손하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온갖 불의한 것을 내버리라고 조언한다. 하나님만 보물로 삼으라고 말한다. 하나님만이 기쁨의 근원이심을 알라고 말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욥의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욥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욥도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자가당착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 욥의 친구들이 자신들은 스스로 죄없다고 자신하는 것부터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 누가 겸손한가? 겸손은 (낮아짐이 아니라) 낮음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겸손에 가깝고 예수께서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누리려면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을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지 자문해 본다. 과연 악한 자들이 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악한 자들이 용서받는 것에 환호성을 질러야 한다. 우리 역시 죄와 허물에서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벌받는 것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멀리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셔서 깨끗하게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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