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0 (1-29)

타순이 돌고 돌아 다시 소발에게 왔다. 소발 역시 두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욥의 말에 화가 났다. 욥의 말에 분명히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겸손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소발은 반발한다. 욥을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거짓 영을 빌어 말을 한다. 거짓 영이란 결국 사람의 지혜다. 인과응보/자업자득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외처럼 보이는 일도 잠깐일 뿐이다. 소발은 욥이 교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욥을 두고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부한 자들, 교만한 자들은 마지막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들이 착취한 재물을 가나한 사람들에게 배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자와 교만한 자의 결국과 마찬가지로 몸이 젊음을 자랑하던 사람의 결국도 죽는다. 사람들은 악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 악이 뱃속으로 내려가 쓴 맛으로 변하고 몸속에서 독이되어버리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악한 자들은 꿀꺽 삼킨 재물을 다 토해 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삼킨 재물을 빼앗아 빼앗긴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삼킨 독으로 죽는다. 이렇게 그들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한다. 탐욕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먹을 것이 풍부해도 악한 자의 번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악한 자의 성공은 재앙과 불운으로 이어진다. 악한자가 먹고 싶은대로 나두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를 비처럼 쏟으실 것이다. 아무도 주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쌓아 올린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삽시간에 없어진다. 하늘이 그들의 죄악을 밝힐 것이다. 땅이 그들을 고발할 것이다. 그들이 세운 것은 모래위에 세운 집 같아서 홍수에 쓸려가듯 다 쓸려갈 것이다.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몫이다.

//과연 소발의 주장대로 욥은 악의 달콤함에 취해 악을 삼키고 말았을까? 그래서 삼킨 악이 독이 되어서 욥의 부요는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의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그러나 욥이 악을 삼켰다는 내용은 없다. 욥은 고통직전까지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탐욕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서 부를 이뤘다는 내용도 없다. 소발은 지금 욥이 처한 상황에서 유추한 결과로 욥을 위선자로 고발하는 것에 불과하다. 소발은 욥이 세운 믿음이라는 집의 기초가 아직 든든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는데, 욥이 모래 위에 집을 세웠다고 평가해 버렸다. 욥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위로가 남아 있음을 몰랐다. 욥은 무너지듯 무너지지 않는다. 기초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기 19 (1-29)

욥기 19 (1-29)

욥이 빌닷에게 대답한다. 언제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파멸시키려고 하는지 묻는다. 욥은 빌닷(친구들)의 말이 언어폭력이요 학대라고 반응한다.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욥은 고통이 자신의 문제인데 왜 너희들이 감놔라 밤놔라 하느냐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들은 의롭고, 욥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 넣으신 분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자신은 위로를 받아도 시원치 않은데, 오히려 언어폭력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친구들이 자신의 신음과 고통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을 한탄한다. 욥은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자신이 가는 길을 어둠으로 막으신다고 말을 한다.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해서 받아야 할 면류관을 벗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온 몸에 고통을 주셔 소망을 뿌리째 뽑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 삼으신다고 욥은 말한다. 가족도 멀리 떠났다. 친척도 친구도 욥을 버렸다. 종들과 나그네들까지 욥을 몰라라 한다. 아내 조차도 욥을 싫어한다. 남여노소 불문하고 욥을 무시하며 구박한다. 친한 친구들도 욥을 꺼리고 등을 돌린다. 욥은 피골이 상접하여 겨우 연명하고 있다. 욥은 이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친구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지만, 그렇다고 친구들도 하나님의 자리에서 자신을 픽밥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겹다고 말한다. 친구라면 자기의 신음을 듣고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의 기록에 남겨 달라고 말한다. 욥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나의 구원자는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분이 땅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죽어 썩어진 다음에라도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욥은 간장이 녹을 만큼 하나님 뵙기를 갈망한다.) 욥은 자신의 말에 친구들이 또 반박하리라는 것을 알고 말한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다. 친구들에게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심판자 하나님을 알라고 촉구한다.

//욥에게 지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친구도 친척도 종들도 심지어 친한 친구와 아내마져도. 그러나 욥이 모든 것을 낯설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욥 자신에 대하여 낯설게 대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자신은 변함이 없는데… 몰골만 달라졌을 뿐인데. 그래도 욥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임을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하나님이 낯설면 어쩌랴!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예수님이 낯설면 어쩌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흔히 보는 예수상의 모습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낯설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만들어 만든 이미지의 주님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서 배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해야 한다. 엉뚱한 것을 주님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욥 18 (1-21)

빌닷이 욥에게 입다물라고 말한다. 욥이 고통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자 빌닷은 발끈한다. 회개도 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욥의 행동은 회개를 촉구하는 자신들의 말을 우습게 (자신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빌닷은 욥이 악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확신한다. 욥이 밝히던 빛은 꺼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욥이 자기 꾀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쳐놓은 덫에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결국은 죽음이다. 부자였던 욥이 굶주리고 주변에 재앙이 늘 도사리고 몸도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이 믿음의 세계에서 죽음의 통치자에게로 끌려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행을 의심치 않는다. 사람들도 더 이상 욥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후손도 끊길 것이다. 욥이 악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결말을 맺은 것을 보고 온 세상이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놀라고 두려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회개도 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욥에게 발끈하는 빌닷. 빌닷은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이 빌닷(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설령 욥 자신이 유죄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주님께 매달려본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 이야기를 소환해 보자.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갔고,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예수께서는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고,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빌닷과 욥은 바리새인과 세리와 닮은 꼴이다 . 고통이 없다고 감사하며 자신의 의(지혜)를 자랑하는 빌닷은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을 높이는 언행이기 때문이다. 반면 고통 중에 기도하는 욥은 세리와 같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진다.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한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한 욥인데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하나님의 자비가 더디다고 세상이 마치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담대하자. 우리는 마지막을 안다.) 

욥기 16:18~

욥기 16:18~

욥은 주님이 자신을 치신 것은 잘못된 일이며, 정의를 회복시켜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노래한다. 욥은 하늘을 자신의 증인으로 신청하고, 높은 곳에 계신 분을 자신의 변호인으로 선임한다. 욥은 이 증인이요 중재자인 친구가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주기를 바란다. 죽음을 앞둔 욥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중재자도 되어달라고 노래한다. 

//욥은 자신의 증인이요, 자신의 변호인인 하늘에 계신 분,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기도하는 것일까? 욥은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늘에 계신 분, 높은 곳에 계신 분만이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 곧 하나님만이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다고 노래한 것이다. (세상 친구들은 참 위로를 줄 수 없다.) 욥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한다. – 우리에게는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친구요 중보자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증인이시다. 이렇듯 성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의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이미 생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으면서도 욥은 하나님과 교제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기도가 그 증거다.

욥기 16:1-16

욥기 16:1-16

욥이 엘리바스에게 대답한다. 욥은 엘리바스가 하는 말을 이미 많이 들었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자신에게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괴롭힐 뿐이라고 말한다. 제발 이런 헛소리를 집어치우라고 말한다. 위로는 고사하고 무엇에 홀려서 자신을 괴롭히는지 묻는다. 만약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가 된다면 욥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지혜로 아무리 격려하고 위로한다고 해도 이 고통과 아픔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욥은 자신은 섣부른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욥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주님이 자신을 치신 증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주님이 욥을 치셨다는 이유로, 욥이 지은 죄로 벌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그래서 욥을 경멸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것은 맞지만 자신은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자신의 기도는 언제나 진실했다고 말을 한다. 

//얘기는 돌고 돈다.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정죄하고, 욥은 언제나 진실(정결/정직)했지만, 즉 무죄지만 이유모를 고통을 받고 있다고 대답한다. 욥에게는 이런 큰 믿음이 있었다. 중국어 성경에서 욥은 約伯(약백)이다. 욥(Job)에서 음을 빌려왔는데 ‘약속의 맏이’, ‘믿음이 크다’로 의미적으로도 잘 맞는 이름이다. 친구들과 다르게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 사람의 말로는 결코 위로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음을 깨닫는다. 욥은 자신의 정결함을 주장한다. –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욥이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릴 시간이 멀지 않다. –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주의 말씀에 마음에 두었다고 노래한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곧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 끝에 붙인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