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17-35

욥기 15:17-35

엘리바스는 욥을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이 배운 지혜를 말해주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배운 지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가르침이요, 세대를 거쳐 내려온 전통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에 따르면 이방인(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땅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항하고 전능하신 분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사로잡혀 악한 일을 했다. 이렇게 헛것을 의지할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결국 악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은 이렇게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 만을 낳을 것이다. 그들의 뱃속에는 거짓만 들어 있을 뿐이다. //엘리바스가 말하는 지혜를 듣고 있자면 나까지 정말 짜증이 난다.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가지 않는 곳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풀어내지 못한다.그러니 결국은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을 대항하고 전능하신 분을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이전과 같이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달리 말하지 못한다. 욥과 친구들이 같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맞나 싶다. 친구들은(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욥이 헛된 것을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 지혜는 권선징악을 벗어나지 못한다. 빨리빨리의 문화에서는 더욱더 새옹지마의 교훈을 염두에 두지 못한다. 하물며 길이 너비 높이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함부로 떠벌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지혜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내 눈 안의 들보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욥기 13:20-14:22

욥기 13:20-14:22

욥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 욥이 바라는 것은 두가지. 첫번째는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둬주시기를 두번째는 하나님 부재의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곧 하나님의 응답을 바란다.

욥은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청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묻는다. 잘못을 알아야 돌이키기라도 하지. ㅠㅠ 더군다나 지금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욥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욥은 주님의 위로를 바라는데 하나님은 욥을 공격한다. 욥은 어릴적부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조받아 자신이 걸레처럼 되었다고 한탄한다.

욥은 인생이 짧고,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피었다 시드는 꽃이요 그림자와 같다고 고백한다. 이런 미미한 자신의 인생을 주님이 살피시는 이유는 묻는다. 존재가치가 없는 자신을 심판대에 세우시는 이유는 묻는다.   (주님만이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을 나오 하실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주님은 인생의 년수를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자신도 짧고 짧은 인생의 남은 기간동안 숨을 좀 돌리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나무는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뿌리가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은 것 같아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지만, 인생은 한 번 죽으면 사라진다고 노래한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 욥은 자신을 지옥에라도 좋으니 잠시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자신의 년수가 차서 죽을 때 다시 기억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한다. 욥에게는 죽는 것이 더 좋은 때다. 고난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이 자신 다시 불러주시길 간구한다. 주님 앞에서면 주님이 자신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주님 앞에 서면 주님이 자신의 죄를 살피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주님께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자루에 넣어 봉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잘못한 사람들은 삶의 희망이 없다. 주님 앞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지옥에 떨어지면 자손의 영광이나 비천과도 끊어진다. 혼자 아픔과 슬픔을 느껴야 한다.

//욥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졌으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인생의 년수를 정하신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남은 세월동안은 고통에 대한 집행유예를 간청한다. 구약에 면면히 흐르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신다는 ‘인과응보’다. 욥도 이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욥은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가장 멀리있기로 으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죄가 어디 없겠냐마는, 그래도 하나님이 욥을 세상에서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 악에서 멀리 떠났다고 인정하셨으니, 심판대 앞에 선다면 욥이 가장 먼저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욥은 이 하나님의 자비에 자기 생명을 건다. 욥이 자신감을 가지고 심판대에 서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자신있게 설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욥기 13:1-19

욥기 13:1-19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욥은 보고 들어서 다 안다고 대답한다. 다시 한번 욥은 친구들이 아는 것만큼 자신도 알고 있다여 자신이 친구들 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오십보백보인) 친구들이 아닌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말씀드리겠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는 위로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거짓말이요 돌팔이 의사의 처방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니 입을 다물라고, 말을 하지 않으면 최소한 무식이 탄로 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주 하나님께 사정을 호소하는 것에 함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욥은 알맹이 없는 말로 자신을 정죄한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호를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자세히 알고 계신다. 거짓된 말로 자신(욥)을 고발하면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두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단언한다. 욥은 다시 한번 친구들의 말은 허사요 잡담일 뿐이니 그만 입을 다물고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말하도록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호흡(육체의 생명)을 위해 주님께 호소하지 않는다. 죽어도 욥 자신이 잃을 것이 없다고 자신한다. 그래도 자신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고 싶어한다.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대답을 듣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겠지만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께 하는 말에 함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욥은 자신의 무죄에 확신을 가진다. 만약 하나님이 유죄선고를 하시면 사형이라고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욥의 주장은 분명하다. 친구들에게 사람의 지혜로 다른 사람의 문제에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은 구원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해했다.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께 물을 수 있고, 주님의 대답을 듣는 것이 구원이라고 노래한다. 욥은 자신이 무죄하니 일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혹여 하나님이 유죄선고를 내리시면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앞에서 정리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 (비록 유죄선고를 받더라도) 구원이기 때문이다. 욥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맡긴다. //욥의 구원관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원임을 배운다. 임마누엘!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연약하다. 그러나 우리도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시기 때문이다-(히4).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

욥기 12:1-25

욥기 12:1-25

소발의 말에 욥이 대답한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소발이 마치 자신은 그 지혜를 아는 듯이 자신을 정죄하자, 너희들만 지혜롭냐고 대꾸한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정도는 자기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문제는 지금 하나님의 침묵이다. 욥은 한때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침묵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조롱받는다고 말한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으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웃는 친구들을 마치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미는 사람들에 비유한다.

욥은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수중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손수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자연미물(만물)도 알고 있다고 말을 한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욥은 지혜는 오래 살았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혜와 권능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슬기와 이해력도 주님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사재인이나 성사재천이다. 능력과 지혜가 주님의 것이다. 그러니 속고 속이는 것도 주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을 한다. 하나님이야 말로 고관들의 옷도 벗기시고 재판관들을 바보로 만들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왕들보다 높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보다도 권세있는 자들보다도 높으시다. 마치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양 떠드는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노인에게서 분별력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귀족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를 당한다. 이렇듯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시다. 민족들의 흥망성쇠도 주님의 손에 달렸다.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소발이 그랬다. 욥은 자신도 그정도의 지혜는 있다고 감히 말한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자연만물(미물)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는 고관들, 재판장들, 왕들, 제사장들, 권세자들, 노인들, 귀족들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참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밝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참 지혜다.) 욥은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여전히 자신에게 임한 고통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 어찌 한 개인의 희노애락을 주관하지 못하랴. 친구들의 정죄와 달리 욥은 조금씩 답에 다가간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내가 답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욥기 11:1-20

욥기 11:1-20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대꾸한다. 소발은 욥의 대답과 욥의 기도를 헛소리라고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친구를 보내셔서 위로는 커녕 정죄만 하게 하셨다는 욥의 말이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소발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를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상은 소발의 소견을 말한다.)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린 벌은 욥이 지은 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깊은 뜻도 모르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토로한 것을 꼬집는것이다.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은 지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소발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욥에게만 적용한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모르는 욥을 미련하다고 판단한다. 욥에게 마음을 바르게 먹고 두손들고 주님을 향해 기도하라고 충고 한다.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충고다. 악에서 돌이키고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해야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지난 괴로움을 다 잊게 될 것이요 생활이 밝아 진다고 권면한다. 이럴 때 희망이 생기고 평안해진다고 말한다.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욥이 회개하지 않으면) 눈이 멀어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악한 사람의 희망이라고는 마지막 숨을 잘 거두는 일 뿐이라고 말한다. (욥이 죽기전에 잠시라도 자신을 내버려 달라고 간구한 내용을 비꼬는 것 같다.)

//친구들은 욥에 대한 정죄를 점점 더 당연시 한다. 정죄 말고는 이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깊고 높고 넓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양 욥을 정죄한다. 소발의 모습에서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의 날선 혀를 보게 된다. 우리는 까닭없는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고통받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드러내심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자. 낮은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수 밖에 없다.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겸손한) 자들이 누리는 복에 동참하는 길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낮아지는 것이다. 가난과 애통과 온유가 복인데 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자비)를 누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