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11

빌립보서 1:1-11

1 발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고 수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다. 수신자에 포함된 감독들과 집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다. 감독들이 성도들의 지도자들이라면 집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자들이다. 역할이 다르지만 성도라는 점에서 동일한다. 왜냐하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발신자인 그리스도 예수의 종도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라는 점에서 수신자들과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누가 크고 누가 작고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평강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를 나눈다.

3,4 성도는 서로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5-7 성도는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만 아니라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을 마음에 간직한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바울의 선한 일에 동참하는, 같은 은혜에 동참하는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이다.)

8-11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예수의 심정으로 보고싶어 한다. 얼굴을 맛대고 볼 수 없으니 하나님께 기도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판단력으로 퐁성하길 기도한다. 그래야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성령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성도는 사랑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을 것이다. 사실 순결하고 흠이 없는 성도 삶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다. 의의 면류관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된다. 

//성도는 얼굴을 맛대고 볼 수 없어도 교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도하면 된다. 몇년 만에 보아도 어제 본 것 같은 친구들… 신실한 친구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하게 된다. 감사하다. 

https://quietwaters.blog/2019/10/13/

욥기 42:1-17

욥기 42:1-17

(1-6) 욥의 대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유구무언이었으니 당연하다. 욥은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욥은 성사재천의 신비를 깨닫자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고 회개한다 (위로 받는다).

(7-9) 주님의 말씀은 욥의 친구들에게 향한다. 주님은 욥이 철회한 주장들은 그래도 옳았다고 인정하시나 친구들의 주장은 옳게 말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고통받는 친구를 위로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그들의 마음을 따지시는 것 같다.) 그래서 욥의 회개는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시면서, 세친구에게는 욥을 통해 용서를 구하라고 명하신다. 욥이 세친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 그때 하나님도 욥의 기도를 들어 세친구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비록 세친구가 어리석게 말을 했더라도 욥이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번제를 드리면 (욥이 용서하면) 잘못을 그대로 갚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세 친구는 주님의 말씀대로 했다. 주님은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가서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10-17) 욥은 세친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세친구가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회복의 복을 받았다. 재산만 회복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욥의 재산이 회복 된 것을 보자. 하늘에서 그냥 재물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욥의 말년이 이전보다 더 복되었다. 자녀도 회복되었다. 아들 딸 구별이 없다. 장수의 축복도 누렸다. live happily ever after. 오랬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동화처럼 끝난다. 성도의 삶도 해피엔딩이다.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욥기 41:1-34

욥기 41:1-34

주님은 욥에게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한마디로 욥은 리워야단에게 쨉도 안 된다고 하신다. 리워야단을 보기만 해도 기가 꺾여 (스스로) 고꾸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세상에 리워야단과 싸워 무사할 사람은 없다고 하신다. 땅 위에 리워야단과 겨룰만한 것이 없다고 하신다. 왜나하면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을 그렇게 (교만한 것들을 우습게 보고, 거만한 것들 위에 군림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주님과 리워야단과 욥. 욥은 리워야단과 맞설 수 없다. 그래도 욥이나 리워야단이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동급니다. 한편 리워야단은 주님과 맞설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리워야단도 다스리신다. 리워야단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어제 언급하신 베헤못이든 리워야단이든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물며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못 미치는 인생은 오죽할까? //그렇다면 인생이 의지해야 할 바가 분명하다. 세상은 리워야단 천지다. 교만하고 거만한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마련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복음에는 고난이 따른다.

욥기 40:1-24

욥기 40:1-24

주님께서 욥에게 말을 해보라고 말씀하시나, 욥은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러자 주님께서 폭풍가운데 다시 말씀하신다. 주님은 욥이 자신이 옳다고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려 하는지 물어신다. 주님은 우리가 교만한 자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고,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짓밟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물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격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악을 심판할 능력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만약 욥이 악을 심판할 수 있으면, 오히려 욥을 찬양하고 욥의 승리를 인정하겠다고까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자기의 무죄를 변론하려던 욥의 입은 하나님의 질문에 오히려 굳게 닫히고 말았다. 유구무언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직접 욥을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어도 어찌 전능하신 하나님과 다툴(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으랴!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감 놔라 배 놔라 기도할 수 있으랴. 그래서 예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니 감사할 뿐이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하나님의 간구로 대체되니 감사할 뿐이다. 기도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깨닫게 하심에 청종해야 한다. 

욥기 38:39:39:30

욥기 38:39:39:30

//사람들은 미물인 (지혜가 없는) 동물의 세계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동물의 질서에서도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신다. 인간의 지혜로는 동물의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도 알 수 없으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의 지혜로 왈가왈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