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19-38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

33절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를 알고 있는지, 또 그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는지 물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뜻도 잘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 못한다. 천하의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욥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려고 우리의 열심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보다 뭐 그리 따질 게 많은지 모르겠다. 가령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라기보다 땅에 적용할 때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 곧 나의 유익을 따지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를 우리가 땅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 우주만물이 주님의 다스림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순종한다. 그런데 오직 사람만이 자기 꾀를 낸다. 그러나 모사인재라도 성자재천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욥기 38:1-18

욥기 38:1-18

갑자기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세 친구와 엘리후까지 싸잡아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말씀하신다. 더 이상 사람의 지혜로 깨달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나를 아느냐?” 하고 물으신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차원이 다르다.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욥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욥이 그토록 고대하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아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욥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욥의 대답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코끼리의 한 부분도 안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아신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작이다. 이 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욥기 36:26-37:24

욥기 36:26-37:24

엘리후는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다고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욥과 세 친구들에게 권한다. 사실 우리들은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기만 할 뿐이다. 창조주의 섭리를 보기는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엘리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욥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알 수 없는 일을 생각하라니. 엘리후 스스로도 우리는 무지몽매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대해 주셔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한다고 말하는 엘리후 자신이 지금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버렸다. //순종이 먼저고 이해가 나중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 적용은 자시에게 하면 족하다. 하나님은 장님이 만져 본 코끼리보다 크신 분이다. 나의 경험만 가지고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도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욥기 36:1-25

욥기 36:1-25

엘리후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곧 죽어도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겠다고 한다. 자기의 모든 지혜를 짜내서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밝히겠다고 말한다.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으리요. 그냥 건전한 세상 지식에 불과하다.) 6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신다고 말한다. 엘리후의 관점에서 욥은 악한 사람인가? 아니면 고난받는 사람인가? 엘리후는  17절에서 욥의 고난/고통이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21절에서는 이 고통이 욥으로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후의 한계다. 25절에서 엘리후가 “사람은 멀리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봅니다.”라고 말하는데서 그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엘리후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건전한 세상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욥기 34:31-35:16

욥기 34:31-35:16

엘리후는 욥의 말을 곱씹어 보면 악한 자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욥은 지은 죄에다가 하나님을 모독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옳다고 하실 것이라는 욥의 주장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떠들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하는 사람은 엘리후다. 욥이 고통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욥의 유무죄와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욥은 이것을 알았고 세 친구와 엘리후는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누가 죄를 지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누구의 죄인지 따진다. 그러나 고통의 자라에 필요한 것은 자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