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4:1-30

욥기 34:1-30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말했다. 엘리후는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세 어른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한다. 엘리후는 세 어른들이 들은 지혜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함께 무엇이 옳은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자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하실 수 없기 때문이란다. 만약 욥이 무죄인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셨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옳지 않을 일을 하셨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하실 없으니 욥이 무죄가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의로우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생면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만이 심판자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면, 곧 악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처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아무도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받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친히 욥을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의인이라고 평가 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보편적 진리(지혜)로 다시 돌아가서 욥을 정죄하고야 만다. 엘리후가 세 친구의 말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결국 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욥에 대한 위로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밝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전지전능, 무소부재 등등 말로 하나님을 수식해 보지만, 이 모든 것 또한 유한한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을 다 담아 낼 수는 없다. 엘리후도 애통하는 욥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욥 31:24-40

욥 31:24-40

욥은 결코 자신의 부를 믿지도 의지하지도 자랑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욥은 자연만물을 우상시 하지도 않았다. 재물과 우상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것은 높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요, 그 벌은 사형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욥은 나아가 원수의 고통과 재난에 기뻐하 않았다. 욥은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했을까?) 욥은 일꾼들이나 나그네를 기꺼이 영접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욥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지 않았다. 욥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살았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이실직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한다.

욥은 자신의 죄를 고발한 고소장 있다면 읽어 보길 원한다. 자신의 고소장을 왕관처럼 머리에 쓰고 다니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욥은 무죄를 자신했다. (고소 내용이 오히려 욥의 의로움만 드러낼 것이다.)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욥의 최후 진술은 이렇게 끝이 났다.

//멀리 계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욥은 이리 떳떳한데…마음에 말씀을 두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나는 아떤가?

욥기 31:1-23

욥기 31:1-23

욥은 자신이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 했음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욥은 금욕적인 삶을 다짐하고 실천했다. 또 욥은 권선징악의 세상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욥의 한계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아신다고 말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욥은 하나님을을 증인 삼아 자신의 무죄를 맹세한다. 하나님도 자신이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죄를 지은 흔적이라도 있다면 유구무언이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들의 탄원을 공평하게 처리했다고 말한다. 종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받은 인격체로 대했다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을 제발 공평하게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욥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했다. 가난한자, 과부, 고아들을 돌봤다. 재판에서도 이들 편에 섰다. 욥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기 때문에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욥은 세상 지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세상 지혜 너머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자신이 처한 사정으로 충분히 유추하고 있다.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의 고통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이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대했듯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비와 공평으로 대해 주시길 노래한다. 극심한 고통중에 내뱉는 욥의 노래는 자기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하는 통곡이요 애곡이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복이 기다린다.)

욥기 30:16-31

욥기 30:16-31

욥은 기진맥진해서 죽을 지경이다. 고통이후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뼈를 깎는 아픔이 그치지 않는다. (뼈를깎기 위해서는 먼저 피부를 도려내야 한다.) 욥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긴 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욥을 진흙 속에 던지셨다고 노래한다. 

문제는 욥의 신음에, 아니 고통에 찬 외침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신다는 것이다. 들은 체도 않으신다. 욥은 이런 주님이 너무 잔인하다고 표현한다. 욥은 이것을 하나님의 갑질(핍박)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바람에 나는 겨처럼 취급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을 대하듯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욥은 이렇게 주님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신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을 치시는 이유를 묻는다. 하나님의 자비 밖에 달리 구할 것이 없는 자신을 이렇게 고통 속에 몰아 넣는 이유를 묻는다.

욥은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해 함께 울었고 궁핍한 사람을 위해 함께 마음 아파했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이웃들과 동병상련했는데, 자신의 고통을 위로해 주는 친구 하나 없다고 말한다. 행복 대신 화가, 빛 대신 어둠이 밀어 닥쳤다고 말한다. 그러니 욥의 마음이 찢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사람들에게 애걸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 자연 미물들은 혹여 욥의 고통을 알아줄까? 피골이상접하여 겨우 호흡만 붙어 있는 욥이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요 애곡이다.

//주여, 우리를 위로의 도구로 사용해 주소서

욥기 30:1-15

욥기 30:1-15

한 때 모든 사람에게 존경 받던 욥은 지금 몸의 고통보다도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에 한탄한다. 그것도 쓸모없는 자들로부터 조롱을 받는다고 노래한다. 욥은 자신의 처지보다 낫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노래한다. 어리석은 자들이요 고향에서 쫓겨난 자들로부터 조롱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모르고 욥을 비웃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욥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가운데 버려두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니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욥은 두려워 떤다. 한 때 존경받던 욥이 이제는 구원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노래한다.

욥은 구원의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고통가운데 친구들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보다 처지가 훨씬 못한 사람들로부터도 조롱까지 받는데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자 구원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ㅠㅠ 욥의 상황이 십분 이해가 된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온전히 위로할 수 없지만, 잘못된 말로 (세상지혜로) 이웃의 희망마져도 빼앗을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말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존경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아침이슬과 같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만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나왔었다는 것을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앞에 꽃길만이 아닌, 여전히 헤쳐 가야할 가시덤불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더디 응답하시고 때론 오랫동안 침묵하심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셔도 마음 속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이 성도에게 임마누엘을 보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