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44-5:10
44-49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집트에서 나온 직후 한 곳에 이르러서 주님께 받아 출애굽 1세대에게 이미 선포했던 그 율법이다. 이제 요단 강 동쪽 벳브올 맞은쪽 골짜기에서 출애굽 2세들에게 율법을 다시 가르친다. 요단 강 동쪽은 아모리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절시키고 차지한 땅이다.
5:1-5 모세는 호렙에서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운 언약을 상기시킨다. 이 언약은 조상들과 세운 것이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 지금 이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운 것이라고 입을 연다. 지금 모세의 말을 듣고 있던 상당수는 어렸지만 그 때에도 있었던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불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들과 서로 얼굴을 맛대고 말씀하시길 원하셨지만, 백성들은 두려워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모세가 중재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말씀을 모세는 다시 전한다.
6-10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이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주의 백성들은 다른 신(하나님)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 주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 사람이 만든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과 삼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말아라VS못한다 – 개역개정에서 ‘말지니라’로 번역한 것을 새번역에서는 ‘못한다’로 번역한다. 그게 그뜻이지만, 새번역이 더 맘에 든다. ‘말아라’라는 명령어다.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명령을 받은 사람의 의지에 달렸다. 그러나 ‘못한다’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이며 결정된 정체성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여자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아라야 하는데, 누가 하지 말라고 명령해서가 아니라, 남자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을 섬길 수 있는데도 의지적으로 안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지 못하는 정체성 때문에 안 섬기는 것이다. 이렇듯 주의 백성은, 성도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정체성이 바뀐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다. 만약 주의 백성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적으로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이미 주의 백성이 아니다. 세상이 한다고 성도가 못하는 것을 따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하는 것을 잘하면 된다. 말장난인가? 요즘 세상은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아니라 못하는 것도 하려고 든다. 정체성 혼돈의 시대를 산다. 두 돌판에서 새겨진 십계명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시금석이라면, 성도에게는 성경말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