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성도가 좋은 선교사 후보다

성도=선교사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교회도 전문인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자비량 선교’라는 말도 회자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통적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창의적접근지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 늘었다. 창의적접근지역이란 선교사의 비자발급, 복음에 대한 거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있어 선교사의 안전이 위협받는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는 좀더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선교가 요청된다. 이런 지역에는 전통적 목회자 선교사보다는 의사 교사 사업가가 더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다. 물론 창의적접근지역에 전통적 선교사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선교사 신분으로는 접근조차 어렵다. 이전에는 전문인이 선교를 위해서 신학적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면, 이제는 목사가 창의적 접근을 위해 전문인으로 훈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가 1992년 처음 평신도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정하고 정주채 목사님을 면담했을 때, 정목사님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먼저 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목회자 소명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당시 저는 평신도/선/교/사 보다는 /평/신/도/선교사 라는 정체성이 강했습니다. 일개 연구원이었던 저는 /전/문/인/선교사 라는 타이틀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오히려 경계를 넘어서도 성도 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교사를 돕는 보조선교사로 자처했습니다. 당시 허영근 집사님 가정과 서정실 선교사와 함께 우리는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제게는 큰 위로가 되는 표현입니다.]

사실 평신도라는 표현은 그리 성경적이지 못하다. 교회 안에 계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냥 ‘성도’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한다.

선교현장에 나가면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는 한인 선교사들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쉽지 않다. 신학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성례를 집행할 자격도 운운되기 때문이다. 전문인 선교사 중에서 그나마 의사 정도가 인정을 받는다. 육신의 생명이지만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전문인선교사들이 모여있는 대학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 선교사들과의 차별을 그렇게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인 선교사들이 방학과 안식년을 이용해서 결국 목사 선교사로 탈바꿈했다.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선교사 사회에도 계급이 있는듯해 보여 아쉬운 대목이다. 선교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된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은 우리보다 차별이 없어 보였다. 선교사 자녀 교육만을 위해서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기도 한다.

[결혼 후 저도 2년동안 선교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장기 사역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못다한 선교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선교사란 경계를 넘어 성도로 보냄을 받은 자다. 선교사 앞에 붙는 목사, 전문인, 의사, 평신도 등등의 구별은 큰 의미가 없다.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를 넘어서도 성도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듯, 본국에서 성도로서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경계를 넘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결국 좋은(건전한) 성도가 좋은(바른) 선교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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