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1:1-23

신명기 21:1-23

1-9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은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성경은 살인을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공동체적 문제라고 인식하는 증거다. 무죄한 사람이 죽은 책임을 공동체적으로 지는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이다.

10-14 여자 포로를 아내로 맞이해도 된다. 아내로 삼기 위해서는 아내의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고 포로로 올 때 입었던 옷을 벗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한달 동안  자기 부모를  생각하며 애곡하게 해야 한다. 그 후에야 동침하여 부부가 될 수 있다. 만약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여자는 자유자가 된다. 그 여자를 종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

15-17 장자권 – 두 아내를 둔 남자의 경우 장자권은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있다. 맏아들을 제쳐놓고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에게 장자권을 줄 수 없다.

18-21 불효자는 돌로 쳐서 죽여할 악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함부로 불효하는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아들을 성읍의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고발 한 후에,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악을 뿌리 뽑아야 한다. 

22-23 죄를 지어 처형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나, 밤을 지내지 말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다. 약속의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살인을 개인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로 본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개인적의 잘못에 대한 벌이라기 보다 공동체에 있는 악의 뿌리를 뽑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인자를 찾지 못한 경우에는 공동체 전체가 죄값을 치러야 한다. //포로로 잡혀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 결혼은 신분상승?의 효과를 가져온다. 포로로 잡혀왔으면 종의 신분이지만, 한 남자의 아내가 됨으로써 종의 신분에서 자유하게 된다. 심지어 한번 결혼이 성립하면, 이후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도 다시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된다. (아리따운 여자 포로를 성적 노리개로 삼다 버리지 말라는 교훈도 있을듯) //장자권은 하늘이 부여한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들의 장자권을 결정할 수 없다. //불효자는 돌로쳐 죽여야 한다. 불효자는  부모공경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 역시 부모의 권한이 아니라 공동체가 결정하고 집행할 문제다. //죽은 자를 나무에 달아 일벌백계로 삼아야 하지만 그날로 묻어야 약속의 땅이 더러워지지 않는다. 이 모든 규례는 약속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성도는 개인으로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단장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8/06/07

신명기 20

전쟁에 나가 적군의 병력이 아군의 병력보다 많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제사장은 싸움터에 나가가 전에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 대적과 싸우러  나갈 때에, 마음에 겁내지 말며, 무서워 말며, 당황하지 말며, 그들 앞에서 떨지 말아라.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싸움터에 나가서, 너희 대적을 치시고, 너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다.]

장교들은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해야 한다.

[집을 짓고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전사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준공식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아직 그 열매 맛을 보지 못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전사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맛보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약혼사람도 돌아가거라. 그가 전사함으로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결혼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전쟁이 두려워서 겁이 나면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다른 형제의 사기만 떨어진다.]

장교들이 이렇게 돌아갈 사람을 추리고 나면 지휘자를 임명해야 한다. 

만약 전쟁을 해야 하면 먼저 그 성읍에 평화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 성읍이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들을 노비로 삼으라고 하신다. 그 성읍이 화친을 거부하고 싸우러 나오면, 그 성읍을 포위하고 공격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그 성읍을 넘겨 주셨으니 그 성읍에 있는 남자는 모두 칼로 쳐서 죽이라고 하신다. 다만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과 그 밖에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가져도 된다. 전리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마음대로 먹고 쓸 수가 있다. 이 정복의 원리를 근원 모든 성읍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산으로 주신 약속의 땅에 있는 성읍들을 점령하였을 때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면 안 된다.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사람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할 것이다.

성을 공격할 때 거기에 있는 과일 나무들을 찍어버려서는 안 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찍어 전쟁물자로 사용해도 좋다고 하신다.

//전쟁보다 화친이 먼저다. 물론 이스라엘에겐 승리의 화친이다. 항복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항복한 사람들을 노예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포함시키라고 하신다. 그 당시의 노예를 오늘날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평화를 선택한 그들은 생명을 구원받았다. 오늘날도 평화가 먼저여야 한다. 평화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전쟁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가나안 정복전쟁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전쟁의 목적은 상대를 진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악을 진멸하기 위함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민족과 나라와 종교에 대하여 선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나의 몸의 일부, 우리 교회 공동체에 대해 먼저 적용해야 한다. 이웃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자비와 관용으로 대해야 하고 ,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신체 일부를 자르거나 뽑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엄격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8/06/06

신명기 19:1-21

신명기 19:1-21

1-7 하나님이 그 땅의 원주민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쫓아내어, 그 성읍과 집에서 살게 될 때, 모든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는 성읍 셋을 따로 구별하라고 하신다. 모든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으나, 모든 살인자가 살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살 수 있는 경우는 1) 미워한 일이 없는 이웃을 뜻하지 않게 죽인 경우 2) 과실치사한 경우 뿐이다. 도피성은 이렇게 실수로 이웃을 죽게 한 경우 자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곳이므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세 성읍을 따로 떼어 놓아 모든 성읍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

8-10 약속의 땅 전부를 차지하게 되면 세 성읍에 또 다른 세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세우라고 하신다. (동편 3곳에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그곳에 3곳으로 총 6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살인되를 지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죄없는 사람이 살인죄를 지고 죽으면 그 책임이 공동체에 있다고 하신다.

11-13 그러나 고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하면, 그가 살던 성읍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도피성에서 그를 붙잡아와 사형시켜야 한다. 고의로 살인을 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죄 없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14 하나님이 유산을 주신 땅의 경계선을 옮기지 말라고 하신다.

15-21 재판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판결해서는 안된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확정할 수 있다. 거짓증언을 사람은 그 증인이 이웃을 해치려고 마음 먹었던 대로 그 이웃에게 갚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거짓증언의 악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이런  악한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악한 일에는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목숨에는 목숨,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로 갚으라고 하신다.

//도피성은 사람의 생명이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살리고, 고의로 살인한 사람에게는 도피성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법’은 (동해복수법은) 잔인한 법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교훈하는 법이다. //죄 없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역으로 말하면 죄있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복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를 도피성 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목숨에는 목숨으로’의 법을 타인에 대해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살인이 무엇인지 재정의해 주셨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다. 이웃을 해치려는 거짓증언도 당연히 살인에 해당 된다. 탐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땅따먹기’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안에 있어야 이런 악한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말씀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신명기 18:15-22

신명기 18:15-22

다시 신명기 말씀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과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주실 것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게 하셨다. 이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요, 이 예언자가 주님께서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제멋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면 그 또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는 일의 결과로 알 수 있다. 말씀의 성취도 없는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함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역할이 중요하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말씀이 있고, 성서 말씀을 깨닫게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누구나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임마누엘!

https://quietwaters.blog/201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