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12-29

사도행전 22:12-29 (공동번역)

바울로의 연설이 이어진다. [다마스쿠스에는 모든 유다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아나니아라는 율법을 잘지키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아나니아가 나를 찾아와 ‘사울 형제, 눈을 뜨시오’ 하고 말하자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다. 아나니아는 하느님이 뜻하신 바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 없으신 분을 알아보게 하시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하느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보고 들을 일을 하느님을 위해 모든 사람 앞에서 증언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렸다. 그 뒤 나는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내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중에 주님을 뵈었다. 주님은 나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 찬동하고 사람들의 옷을 지켜주었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이방인에게로 보낼 터이니 어서 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바울로의 말을 들은 유다인들은 바울로를 죽일 놈이라며 아예 없애버려라 하고 소리질렀다. 군중은 미친듯이 고함을 지르며 동요했다. 파견대장은 울로를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바울로를 향해 소리지르는 알려고 채찍질해서라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이 바울로를 결박하자 바울로는 곁에 있던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 했다. 백부장은 파견대장에게 바울로가 로마시민인데 어떻게 할지 물었다. 파견대장은 바울로에게 와서 바울로가 로마시민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물었다. 바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파견대장은 자신은 돈으로 로마시민권을 얻었다고 말했다. 바울로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다로 밝혔다. 바울로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물러났고, 파견대장도 바울로가 로마시민으로 확인되자 겁을 먹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와서 눈을 뜨게 하고 사명을 전달하고 세례를 준 아나니아를 모든 유대인이 존경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아나니아를 예수의 제자나 예수교의 신자라고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도 언급하지 않고 그 죄 없으신 분이라고 최대한 군중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았다고 말을 하자 군중들을 바울을 죽일 듯이 성을 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할  없었다. 성전과 이방인을 함께 언급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결국 유대인 군중은 바울의 말에 귀를 닫고 바울을 죽이라고 입을 열었다. //바울은 자신 역시 예수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유대인들의 전도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나의 간증이 전도의 도구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는 간증 자체는 무용지물이다. 가끔 스님이었다가 혹은 무당이었다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간증이 유통되나 호기심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로마군인들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로마군 파견대장(천부장)은 바울을 다소시민으로만 알고 있다가 로마시민이라는 말에 겁이 났다. 로마시민이 무엇이기에.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는 것과 버금가는 말일 것이다. 로마 황제의 시민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로마 시민권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듯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로마인들의 시민의식도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도 소용없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한다.

사도행전 21:37-22:11

사도행전 21:37-22:11 (공동번역)

37-40 병영 문까지 끌려가 바울로는 파견대장에게 그리스어로 말을 붙였다. 파견대장은 바울로가 그리스 말을 할 줄 알자 얼마전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사천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이집트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바울로는 자신은 길리기아 다르소 출신의 유다인이요, 도시의 시민이라고 (로마시민권을 가졌다고) 대답한 뒤 군중들에게 한마다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파견대장이 허락하자 바울로는 층계에 서서 군중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고, 잠잠해 지자 히브리말로 연설했다.

22:1-11 [형제와 선배여러분, 내가 나 자신에 관해 해명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군중들은 바울로가 히브리 말로 연설을 하자 더 조용히 들었다. [나는 유다인이다. 태어나기는 길리기아 다르소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믈리엘 선생 아래서 율법에 대해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내가 하느님을 공경하던 열성은 이 자리에 인 여러분의 열성에 결코 못지 않았다. 나는 에수교인이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투옥시키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예수교를 박해하던 사람이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대사제와 온 의회가 증명해 줄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다마스쿠스에 사는 에수교를 박해하기 위한 공문을 가지 떠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 주위를 비쳤다. 내가 땅에 꺼꾸러지자 ‘사울아 사우라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렸다. 나의 일행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 나는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께서는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들어가라. 거기에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못보게 되어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다.]

//바울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다. 바울이 순회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산이 바로 그리스어라고 생각된다. 바울은 로마라는 제국 내에서 선교를 했다. (바울이 기회가 되면 가보고자 했던 스페인 역시 로마제국의 끝자락에 속해있었다.) 각 지역마다 방언과 문화가 달랐지만 그리스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영어가 헬라어 자리를 차지한다. 중국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서툴더라도 현지인들과 영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영어도 잘 못한다.) 중국어도 캄보디아어도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잘 하지 못했다. 엠으로써 나는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바울은 유대인 군중을 향해 히브리어로 연설을 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연설을 청종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로마군 파견대장에게는 그리스어로 다소출신의  ‘(로마)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말로 다소에서 태어 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이유는 정체성의 혼돈이 아니라,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이라도 더 구원코자 함이었다. (고전 9:19-23) 복음을 위해서였다.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열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박해하는 잘못일 수도 있다. 인생의 주어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나의 열심이 아니라 나의 순종으로 드러나야 한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유대혈통과 로마시민권, 로마 군사들에게 들려서 영내로 가던 바울이 눈이 멀어 동행하던 사람들에게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  성전이 아닌 이방 군부대가 오히려 바울에게는 안전지대가 되는 등 대조적인 이미지가 다양하게 떠오르는 아침이다. 그런데  이 모든 대조가 복음증거라는 한 곳을 향해 나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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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7-36

사도행전 21:17-36 (공동번역)

17-24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로 일행은 교우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도착 다음날 바울로 일행은 바울로를 따라 야고보를 방문했다. 다른 원로들도 야고보와 함께 있었다. 바울로는 자기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하신 일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바울로의 보고에 모두 하느님을 찬양했다. 원로들은 유다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데 골몰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바울로가 이방인들 가운데 사는 유다인들에게 모세를 배척하고 할례도 베풀지 말고 유다인 풍속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바울로가 예루살렘에 온 것을 알게 될 터이니 하느님 앞에서 맹세한 사람 넷을 데리고 가서 정결예식을 행하고 그 비용을 대면 유다인들이 바울로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며, 도리어 바울로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25 예루살렘 공의회 내용 반복

26-36 바울로는 야고보와 원로들의 제안대로 했다. 이레 동안 정결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로를 알아봤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로가 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유다인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라고 고발하고 이방인들까지 성전으로 데리고 와서 거룩한 곳을 더렵혀 놓았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바울로가 에페소 사람 드로피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바울로가 그 이방인을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울로를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성전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바울로를 죽이려고 했다. 이 소동이 로마 군 파견대장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즉시 군인들과 백부장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바울을 때리고 있는 사람들은 로마군을 보고 때리던 손을 멈췄다. 파견대장은 바울로를  체포하고 결박하고 사건을 조사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발하는 내용이 서로 달라 진상을 알 수 없어 바울로를 병영으로 우선 끌고갔다. 군중들이 난폭하게 굴어 군인들이 바울로를 지키면서 병영문으로 데려갔다. 군중들은 바울로를 죽여라 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따라갔다. 

//바울은 야고보와 원로들의 제안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나 화평차원에서 그들의 제안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와 원로들의 제안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시아지역에서 바울의 사역을 직접 목격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은 성전에 있는 바울을 유다인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한 사람이라고 고발했다. 바울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로 성 밖으로 끌려나가 맞았다. 로마군 파견대장의 발빠른 조치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를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도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더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갇혀 땅끝에서 (지리적인 땅끝보다, 문화적 사회적 땅 끝)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생생한 일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지리적 땅 끝에 가서 사는 엠들도 문화적 사회적 땅 끝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수가 많다. 하물며 파송 교회는 어떨지 뻔하다. 복음보다 파송교회의 전통과 관습과 문화가 앞세우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사도행전 21:1-16

사도행전 21:1-16 (공동번역)

우리는 (바울로 일행은) 에베소 원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곧장 코스로 갔다가 이튿날 로도스를 거쳐 바라라로 갔다. 거기에서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타고 키프로스를 끼고 시리아를 향해 내려가 띠로로 갔다. 띠로에서 신도를 만나 이레동안 교제했다. 띠로의 신도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울로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바울로 일행은 그곳을 떠났다. 띠로의 모든 신도들은 부인들과 아이들과 함께 동네 밖까지 나왔다. 바닷가에서 우리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후 헤어졌다. 우리는 항해를 계속하여 프톨레마이스로 가서 그곳 교우들과 하루 교제하고 다음날 가이사리아로 가서 전도자 필립보의 집에 들어가 머물렀다. 필립보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딸 넷이 있었는데 모두 예언자였다. 필립보에 여러날 머무는 동안 하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다에서 내려왔다. 하가보는 ‘성령께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바울로를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줄 것이다’ 하고 예언했다. 우리들은 그곳 사람들과 함께 바울로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고하게 권했다. 그러자 바울로는  ‘주 예수를 위해서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묶일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바울로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가이사리아의 신도 몇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키프로스 사람 므나손의 집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므나손의 집에서 묵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아?? 띠로의 신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이 성령의 지시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누가가 전도자 빌립의 네 딸이 모두 예언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그들의 예언/의견은 기록하지 않는 이유다. 빌립의 집에서, 유대에서 온 예언자 아가보의 예언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구속되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지는 환상을 보았을 뿐일 것이다. 성령께서 신도들과 예언자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투옥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환상의 내용이 올라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방문하는 곳의 신도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당하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곧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바울은 투옥이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같은 환상을 보고 다르게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신도들처럼 주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으면 순종하면 된다. 순종할 힘을 주소서.

https://quietwaters.blog/2018/02/23/

사도행전 20:28-38

사도행전 20:28-38 (공동번역)

바울로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권면한다. [먼전 자신을 살피고 성령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잘 돌보아라.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신 분은 성령이시다. 그 성령게서 여러분에게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 내가 떠나가면 사나운 이리떼가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떼를 마구 헤칠 것이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그리스도 예수 대신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언제나 깨어 있어라. 내가 삼년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각 사람에게 쉬지 않고 훈계하던 것을 잊지 말아라.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이 여러분을 완전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으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유산을 차지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했다. 여러분도 나를 본받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라. ]

바울로는 권면을 마치고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들은 모두 많이 울었다.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다시는 대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로의 말에 에베소 원로들의 마음이 아팠지만 바울로를 배에까지 전송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32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에베소 교회를 맡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시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볼 수 없다. 그나마 가시화 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이다. 성서 두루마리가 아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에베소 성도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 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장로들의 말도 진리를 그르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말씀으로 완전하게 자란 성도는 유산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산다. 성직자만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은 일을 해서 필요를 채웠고, 약한자들을 도왔으니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면 스스로 수고해서 먹고 살고, 또 약한자들을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방법이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물리적으로는 헤어지지만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영원한 교제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