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36-16:15

사도행전 15:36-16:15 (공동번역)

15:36-41 나바는 바울로의 제안에 따라 선교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 요한도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로는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요한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다. 바르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기프로스로 떠났다. 한편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주님의 은총을 비는 교우들으 인사를 받으며 안티오키아를 떠나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두루다니며 모든 교회에 힘을 북돋아주었다.

16:1-15 바울로는 데르베에 들렷다가 리스트라로 갔다. 리스트라에는 디모테오라는 신도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예수를 믿는 유다여자 였으며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디모테오는 리스트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동참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지방에 있는 유다인들을 고려해서 디모테오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 

바울로 일행은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전하며 지키라고 했다. 그래서 교회들은 믿음이 점점 더 굳건해졌고 신도의 수효는 나날이 늘어갔다.

성령께서 그들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다니다가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미시아를 그냥 지나쳐서 트로아스로 갔다. 그곳에서 어느날 밤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다. 바울로는 그 신비로운 영상을 보고 난 뒤 마케도니아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누가가 합류했다)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네아폴리스로 갔다가 다시 필립비로 갔다. 필립비는 마케도니아의 첫 지방의 도시로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는 며칠동안 이 도시에 머물렀다. 안식일이 되어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로 가서 거기에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 리디아라는 티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장수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주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로의 말을 경청하게 하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리디아는 자신을 주님을 충실한 신도로여긴다면 자기집에 머물러 달라고 우리를 초대했다. 

//바울과 바나바의 요한에 대한 이견/다툼을 어떻게 봐야할까? 복음의 확장을 위해 성령께서 세포가 분열하듯 바울과 바나바를 떼어 놓으신 것이 아닐까? 성령의 인도를 받자고 함께 기도했으면 둘이 헤어질 이유가 없었을 위로와 성령의 사도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둘이 함께 갔으면 기존교회를 방문하는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성령의 인도보다 둘이 잘 아는 길로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이 갈라섰기에 선교는 더 팽창할 수 있었다. (이제 바울 중심으로 선교이야기가 진행된다.) //바울이라도 여전히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다. 소아시아 지역은 흩어진 유다인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것으로보아도 바울 일행은 아직까지는 유다인 중심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을 유다인 회당 중심 선교에서 벗어나 이방인 중심의 사역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소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쪽으로 건너가게 하셨다. 이때부터 저자인 누가가 바울 일행에 합류한다.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방인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하나님(신)을 공경/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넬료와 루디아가 대표적이다. 이때 하나님(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신)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건전한 종교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복음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타종교 사람들을 사탄 대하듯 대하면 안 된다. //루디아는 자신을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긴다면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바울 일행을 자기집으로 초청했다. 바울 일행은 루디아집에 가길 꺼렸는지도 모른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듯이 아직까지는 유다인의 전통을 중시했을 것이다. 유럽지경의 첫교회는 회당중심이 아닌 가정교회로 시작한다.

사도행전 15:12-35

사도행전 15:12-35 (공동번역)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구원 받는 것도 주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베드로의 증언에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여러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에 대해 보고 했다. 두 사도의 보고가 끝나자, 야고보가 말했다. 1)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돌보시어 이방인들 가운데서 주님의 백성을 삼으신 경위를 시몬 베드로가 증언했다. 2)베드로의 증언은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한다. 예언서에 ‘그 뒤에 내가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지으리니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치고 그것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살아 남은 백성들이 다 주를 찾고 내 백성이 된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주를 찾게 되리라. 오래 전부터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아모스 9:11,12) 3)그러므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4) 다만 우상에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좋겠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모세의 율법을 풀이하고 그 율법을 안식일 마다 읽는 회당이 있다.)

그래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신도들과 의논하여 대표를 뽑아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보내기로 작정했다. 대표로 바르사빠라는 유다와 실라가 뽑혔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과 한 형제가 된 우리 사도와 원로들은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드린다. 우리 (유다인) 신도 중 몇몇이 여러분에게 가서 엉뚱한 말로 여러분을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시킨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표 몇을 뽑아 바르나바와 바울로와 함께 여러분에 보낸다. 바르나바와 바울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대표인 유다와 실로가 이 편지의 사연을 직접 말로도 전해드릴 것이다. 다음 몇가지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다. 1)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2)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이 몇가지만 삼가면 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대표단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서 회중을 다 모아놓고 편지를 전했다. 회중은 편지를 읽고 격려를 받았으며 또한 기뻐했다. 예언자인 유다와 실라도 교우들을 여러 말로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유다와 실라는 거기서 얼마동안 교제하다가 평안의 작별인사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계속해서 안티오키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다.

//할례와 율법준수가 구원의 전제냐는 문제는 베드로의 “우리는 그들이 (이방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라는 선언으로 일단락되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 할례와 율법준수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선언과 아모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방 신도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의 멍에로 괴롭히면 안 된다고 선언한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할례와 율법준수로 이방인을 옭아맬 수 없듯이 이방인들이 할례와 율법준수의 자유함으로 유대인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몇가지 유대 전통에 대한 존중을 당부한다. 이렇듯 유대인과 이방인 형제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원리적으로는 확실하다. 적용은 항상 어렵다. 성령하나님의 인도에 예민해야 할 이유다. 편지에 이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라고 적은 야고보와 같이 성경적 확신과 개인적 의견이 조화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15:1-11

사도행전 15:1-11 (공동번역)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돌아와 머무르고 있을 때) 유다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그들과 격렬한 의견충돌과 논쟁을 벌였다.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치면서 이방인들이 개종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니키아와 사마리아 교우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한 이야기에 크게 기뻐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사도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주신 일들을 모두 보고했다.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은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일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회의를 열었다.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입을 빌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자신을 뽑아주셨다고 입을 열었다.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이방인들에게도 내리셔서 우리와 똑같이 인정해 주셨으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유다인들과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유다인들도 감당하지 못했던 명에를 이방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지 반문했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도들도 유다인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자신의 믿음대로 말했다.

//율법을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바리새파 신도들의 주장이다. 말씀과 성령 위에 전통과 관습이 지배한 결과다. 그렇지 않다면 민족주의를 탈피하지 못한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에서도 높아지려는 태도다. 높아지기 위해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세다. 구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유대교전통은 그리스도교에 유익할지 몰라도 필수 요건은 아니다. 필수요건은 성령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새로 나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 새로 나는 것은 주 예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거듭난 자가 주장할 수 있는 기득권은 ‘낮아짐’이 유일할 것이다.  

사도행전 14:19-28

사도행전 14:19-28 (공동번역)

두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선동해 바울로를 돌로쳤다. (바나바는?) 군중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바울은 들려나가면서 스데반 때 일을 기억했을?) 그러나 신도들이 달려와 바울로 주변에 둘러섰을 때, 그는 깨어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났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데르베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신도를 얻얻고 리스트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갔다.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했다. (두 사도는) 각 교회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뽑아 세우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는 주님께 원로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빌고 떠났다. 

두 사도는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 밤필리아에 이르러 베르게에서 말씀을 전한 다음 아딸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그들을 파성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로 복귀했다. 두 사도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 온 교회 신도들에게게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주신 모든 일과 또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일을 보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신도들과 오랫동안 교제했다.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에 앞장섰고 원정박해를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대로 돌려받는 모양새다. 그러나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듯 보였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용하신다. (만약 택할 수 있다면 나는 스데반의 길을 따르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대로 되길 바란다. ) //스데반은 순교의 길을 바울은 고난의 길을 걷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신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격려했다. 바울은 자신이 권면한대로 살았다. //두 사도는 교회마다 원로(장로)들을 세웠다. 짧은 시간에 교회가 서고 장로들이 세워졌다. 자신들이 파송받을 때처럼 금식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해서 교회 리더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주님께 그들을 위탁하고 떠났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선교지에서도 금물이다. 주님이 하신다. 주님이 내게 하셨듯이 피선교지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신다. //두 사도는 파송교회가 있는 시리아 안디옥으로 복귀했다. 두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모든 일과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일을 보고했다. (선교보고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시다. 내가 주어가 되는 것에 조심해해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 안디옥 성도들과 교제했다. 선교사에게 (안식?기간에) 모교회 성도들과 교제보다 더 좋은 재충전은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