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1-18

예레미야 39:1-18 (새번역)

1-3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이. 뚫렸다. 성의 중앙 대문은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이 차지했다. 

4-7 시드기야와 군인들을 모두 도망했다. 시드기야는 여리고 평원에서 사로잡혀 바빌로니아 왕 앞에 섰다. 바빌로아니 왕은 시드기야 아들들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유다의 귀족들도 처형했다. 시드니야는 두 눈을 뺀 다음 쇠사슬로 묶어 바빌로니아로 끌고갔다.

8-10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왕궁과 민가를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벽도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과 투항한 사람들을 바빌로이아로 잡아갔다. 바빌로니아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은 빈민들을 유다 땅에 남겨두고 그들에게 땅을 나눠 주었다.

11-14바빌로니아 왕은 근위대장에게 예레미야를 잘 보살펴주고 예레미야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라고 명령했다. 근위대장과 바빌로니아 관관들은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예레미야는 남은 백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15-19 에티오피아 사람 에베멜렉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빌로니아 침공 때 칼에 죽지 않고 살았다. 주님을 의지 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루살렘과 성전은 망하지 않는다는 맹신이 아니다. 내 뜻과 다르더라도 항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 뜻을고집한 고관들은 불순종으로 인한 죽음의 길을 갔다. 친애굽파 고관들에게 놀아난 시드기야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반면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살았다. 수치스럽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한 결과다. 에벳멜렉은 고관들의 악의를 알았고, 의로운 (주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예레미야를 구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상으로 받았다. 이것이 영생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주) 가난한 백성들은 땅을 분배 받았다. 천국을 차지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다.    

2024 07 27

예레미야 38:14-28 (새번역)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성전 셋째 문 어귀로 데려왔다. 왕은 시드기야에게 주님의 신탁에 관해 숨김없이 말해 달라고 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목숨을 걸고 숨김없이 대답하겠다고 말했다. 왕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레미야를 죽이지도, 죽이려는 사람에게 넘겨주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빌로니아 왕에게 항복해야 한다. 그런면 너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너의 집안이 모두 살아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이 도성이 바빌로니아 손아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이 도성에 불을 지를 것이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빌로니아에 투항하면 그들이 자신을 친바벨론파 유다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그들이 자신을 학대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부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재차 말했다. 그래야 목숨도 구하고 형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항복하기를 거부하면 (경고성)신탁의 내용대로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왕과 왕족들이 바빌로니아에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불에 타버릴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주님의 신탁을 어디가서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발설하면 죽은 목숨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요나단을 집으로 돌려보내 죽일 것이니, 자신과의 대화를 비밀로 하고, 다만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불러 왕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었다. 예레미야는 왕이 당부한 대로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근위대 뜰 안에 머물러 있었다.

예레미야 38:1-13

예레미야 38:1-13 (새번역)

유다 대신들은 예레미야가 온 백성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무는 사람은 전쟁 기근 염병으로 죽을 것이지만 바빌로니아 군에게 항복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자기 목숨만은 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패망은 확정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다 대신들은 왕에게 친바벨론을 주장하는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유다의 평안 대신 재앙을 재촉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시드기야는 죽이든 살리든 대신들의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왕자 말기야의 집에 있는 물웅덩이(우물?)에 집어 넣었다. 우물 속에는 물이 없고 진흙만 있어서 예레미야는 진흙 속에 빠졌다.
왕궁에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에벳멜렉은 왕에게, 대신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한 일은 악하다고 말했다. 성안에 먹을 것이 없는 마당에 우물 속에서 굶어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다. 왕은 에벳멜렉에게 군인 삼십 명을 데려다가 예레미야를 우물 속에서 끌어올리라고 명했다. 에벳멜렉은 헤어지고 찢어지 옷 조각들로 밧줄을 만들어 우물 속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내려/주었다.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의 말 대로 밧줄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 대고 밧줄에 매달렸다. 사람들이 밧줄을 끌어 당겨서 예레미야를 우물 속에 끌어올렸다.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고관들과 에벳멜렉의 태도는 예레미야에 대한 대접에서 드러난다.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발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반면 혈통적으로는 유다인이 아니지만 에벳멜렉은 고관들의 태도는 악이라고 규정한다.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고발한 것은 예레미야가 평안의 신탁대신 재앙의 신탁으로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에벳멜렉은 먹을 것이 없는 마당에 입하나를 줄이겠다는 고관들의 악의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다. //주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주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형제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에벳멜렉은 ‘왕의 종’이라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에티오피아인 에벳멜렉에게 왕은 일차적으로는 시드기야였으나 그에게 진짜 왕은 ‘주’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악’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번 주, 아침이슬 김민기 님이 별세했다. 그는 무종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그분이 참 예수쟁이로 살았음을 드러낸다. 물론 그분은 주님을 ‘금관의 예수’를 통해서만 불러내었을 뿐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자신의 고백이 아니었다. 그분은 종교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장 처음 말씀하신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한 복을 구하며 그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사셨다고 본다. 그래서 내가 부끄러워지는 주간이다. 에벳멜렉에 김민기 라는 이름이 오버랩 된다. 나의 왕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의 종인가?

예레미야 37:11-21

예레미야 37:11-21 (새번역)

바빌로니아 군대가 바로의 군대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철수했다. 예레미야는 집안의 상속재산 문제로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길을 떠났다.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이리야라고 하는 수문장이 예레미야가 바빌로니아로 투항하러 간다고 체포하여 고관들에게 데려갔다. 고관들은 예레미야에게 화를 내고 때린 다음에 서기관 요나단의 관저에 있는 지하 감옥에 오랫동안 감금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주님의 신탁에 관해 은밀하게 물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무슨 죄로 자기 감옥에 가두냐고 호소했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가 우리나라를 치러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예언자들에게 묻지 왜 자신에게 주님의 신탁을 묻는지 반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간청했다. 시드기야 왕은 신하에게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매일 빵을 한 덩이씩 가져다 주게 하였다.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친바벨론 분자로 몰려 서기관 요나단의 집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에게 불려간다. //탈바벨론에 관한 신탁을 원하는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는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어디에 있기에 자신에게 주님의 신탁을 묻느냐고 반문한다. (예언자들을 통한 주님의 신탁은 언제나 경고용 아니면 징벌용이다. 평화와 축복은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결과다.) 시드기야는 순종 없이도 평화를 받겠다는 속셈이나, 주님이 듣지 않으신다. //한편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서기관 요나단의 관저 지하감옥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간청한다. 지하감옥에 투옥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간청을 다 했을까?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빵을 주라고 명한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는 지하감옥에서 햇빛을 전혀 못보고 먹을 것도 거의 공급받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주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듣지 못했지만, 신실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주님으로부터)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다. 떡도 떡이지만 하늘을 보장 받았다. 물론 주님은 지하 감옥에도 함께 하신다. 갇힌 신세는 변함이 없지만 주님은 신실한 자를 보호하신다.

예레미야 37:1-10

예레미야 37:1-10 (새번역)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고냐/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유다 왕을 앉혔다. (예레미야의 신탁대로 진행된다.) 그런데도 시드기야 왕이나 신하들이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전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시드기야가와 신하들과 온 백성은 바빌로니아 군인들이 이집트 바로의 출병 소식에 예루살렘에서 퇴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뜻을 거스리는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요청했다. 예레미야가 아직 투옥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바로의 군대는 이집트로 돌아가고 바빌로니아 군대는 다시와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질러 버릴 것이라고 유다 왕에게 재차 전하라고 하셨다. 주님은 바빌로니아의 철수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시면서 평화의 메시지에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것이 주님의 신탁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신탁은 진행형이다. 여호야김의 말로와 여호야긴의 폐위가 그렇다. 그렇다면 주님의 신탁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바빌로니아에 의해 세워진 시드기야도 반(탈)바벨론이 기도제목이었다. 시드기야 왕은 바로의 출정과 바벨론의 퇴각이라는 국제정세에 고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거듭 거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따라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바벨론과 화평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과 성전의 평안을 간구해달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방편이다. 모르면 물어야 하고, 거듭 거듭 말씀하시면 순종할 힘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더욱더 그래야 한다.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6:20-32

예레미야 36:20-32 (새번역)

고관들은 두루마리를 보관하여 두고 왕에게 가서 두루마리에 관해 말했다. 왕은 여후디아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다. 여후디아가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왕과 모든 고관들 앞에서 낭독했다. 때는 겨울이었고 왕 앞에는 화로가 있었다. 왕은 여후디아가 두루마리를 서너칸 읽어 내려갈 때마다 읽은 부분을 칼로 잘라 난로에 던져 태웠다. 왕과 신하들은 두루마리의 말씀을 듣고서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면서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다.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라먀가 왕에게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도록 간청했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오히려 서기관 바룩과 예언자 예레미야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숨기셨다.
왕이 두루마리를 불태운 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먼젓번 말씀을 다시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불태운 유다왕 여호야김의 자손 가운데서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시체는 바깥에 버려져 뒹굴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고 하셨다. 주의 경고를 듣지 않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모든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바룩에게 주었고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는데, 이번에는 그와 비슷한 말씀이 더 많이 추 되었다.

//두루마리가 처음 낭독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이 선포되었다. 두루마리가 두번째로 서기관을 중심으로 한 고관들에게 낭독되었다. 그들은 두루마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왕에게 보고했다. 마침내 두루마리는 왕 앞에서 세번째로 낭독되었다. 삼 세번!. 그러나 왕은 두루마리를 칼로 찢어 태워버렸다. 옷을 찢고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두루마리를 태워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처음 금식을 선포했을 때와 상황이 바뀌었다. 완악한 마음은 벌을 자초한다. 백성들에게도 재앙이 기다릴 뿐이다. //말씀은 영원하다. 찢어 불태웠지만 주님은 두루마리를 새로 기록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씀이 기록된다. 그리고 비슷한 말씀이 더해진다. 빈복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말씀이다. // 찢어버리고 태운다고 세상 근심을 없앨 순 없다. 그 결국은 사망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