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32-48

모세는 개인적인 성깔로 함부로 말해 화?를 입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야훼의 분부를 어기어 뭇 이교도들을 멸하지 않고 그들의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잡혀가고 원수들의 지배를 받게 된 이유다. 주님은 그래도 그들을 멸하지 않으셨으나 그들은 주님께 항거하면서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이때도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은 그들의 신음에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시고 그들이 포로지에서 동정을 받게 하셨다. 시인은 이런 하느님께 구원을 바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찬미할 때, 온 겨레가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바라며 노래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106:13-31

시편 106:13-31 (공동번역)

시인은 주님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는 이유를 주님이 구원해주신 일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광야에서 주의 백성이라도 투정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주님은 주의백성의 필요를 챙겨주시면서도 불순종에 대한 벌을 내리신다. 지도자를 시기하고 투기한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를 지진으로 묻어버리고 불길로 살라버리셨다. 주의 백성은 호렙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예배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그들의 영광을 우상과 바꾸어 버렸다. 구원자 하느님을 잊어버린 결과다. 이집트에서 홍해에서의 일을 모두 잊어버렸다. 주님이 이런 백성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 홀로 주님이 진노를 거두시게 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약속의 땅을 마다했을 때, 주님은 결국 사막에서 이들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그 자손들을 이방인들 사이에 낮추시고 여러나라에 흩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주의 백성은 브올에서 바알신에게 굴종하고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못된 짓으로 하느님을 진노케 했을 때에는 비느하스가 나서서 법으로 다르지자 비로소 재앙이 물러갔다. 이 일로 비느하스 가문은 대대로 은덕을 입게 되었다.

//시인의 노래를 적용하자. 우리가 만약 아침마다 주님의 말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주님의 구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잊어버린다. 주님의 구원을 잊어버렸다면, 시기하고 투기한 자들을 벌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상에게 굴종하고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못된 짓을 한 자들을 벌하신 주님이라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구원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 굴종한 자들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자비로우시면서도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담당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아침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시편 106:1-12

시편 106:1-12 (공동번역)

시인은 할렐루야!로 노래를 시작한다. 주님의 영원한 어짐과 사랑에 감사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주님에 대한 찬양은 끝이 없을 것이다.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님 앞에 선 시인은 항상 바로 살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주님은 항상 바로 살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을 어여삐 여기신다. 시인도 의인의 회중에 들기를 간절이 노래한다. 바로 살고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복도 개인적인 복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복이다. 시인은 택하신 백성과 함께 복을 누리고 택하신 백성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누리길 원한다. 이 공동체적 복이 곧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것으로 노래한다.
물론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조상들처럼 범죄하고 빗나가고 거역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언약에 의지한다. 조상들은 원수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찬양했지만, 시인은 주님의 영원한 어짐과 사랑에 감사하며 노래를 한다.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랄까? – 항상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삶의 원동력이다. 혼자만이 아닌 공동체와 함께 누리는 복이다. (둘째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

시편 105:24-45

시편 105:24-45 (공동번역)

주님은 이집트에서 야곱의 자손들이 크게 불어나게 하셨다. 원수들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다. 그러자 원수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속인수를 썼다. 하느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함족의 나라 이집트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는 이집트에 열가지 재앙으로 내리셨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이 맏이들을 치시고 주의 백성들이 금과 은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떠나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 광야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바위를 열어서 물도 주셨다.
이렇게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 자손에게 물려주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땅값으로 하느님이 주신 법규를 따르고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법을 지켜야 했다. 할렐루야!

//45절에서 (공동번역) 시인은 주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따르고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법을 지키는 것을 약속의 땅에 들어간 땅값이라고 노래한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님의 법을 따르고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도 구원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받은 것에 대한 댓가를 치른다는 의미다. 구원은 댓가를 치르고 받는 것은 아니지만 받으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충성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하느님은 착취와 억압에서 건져내시고, 발걸음이 가볍도록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원망과 불평과 배반에도 먹여주시면서까지 하느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셨다. 주의 백성은 땅값을 치러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나라의 땅값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매일매일 갚아야 한다.

시편 105:12-23

시편 105:12-23 (공동번역)

야훼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언약 백성은 적은 수효요 하찮은 사람들이요 떠돌이였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은 아무도 떠돌이 신세의 언약백성을 억누르지 못하도록 세상 임금들에게 경고까지 하시며 언약백성을 지키셨다. 기근으로부터 언약 백성을 지키시기 위하여 요셉을 종으로 팔리게 하시고, 종으로 팔린 요셉을 여러나라를 다스리는 이집트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고 이집트 왕의 신하들을 교육하고 지혜를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셨다. //평안만 구하는 가치관으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아브라함은 늦둥이 하나만 보았다. 약속의 땅도 받지 못했다. 기근으로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적은 수요요 하찮아 보이는 떠돌이였지만 주님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 땅의 권세자들로부터 돌보셨다. 언약에 신실하셨다. //야곱의 때에는 더 비참하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브라함에 비해 많은 수라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자식은 없었어도 사병을 318명이나 거느린 그래도 부족장이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나뉘었고 하란으로 피난갔다 돌아왔으니 족장으로서 거느린 무리가 오히려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야곱을 이집트로 보내셔서 큰 무리를 이루게 하셨다. 종으로 팔린 요셉을 통하여 주님은 야곱의 후손을 지켜주셨다. 언약에 신실하셨다. //시인은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노래한다. 추상적인 주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 행하신 주님을 소환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이 언약의 핵심이다. 주님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