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8-25

마태복음 1:18-25 (공동번역)

마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한 사건은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천사가 법대로 사는 마리아의 정혼자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과, 태어날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는 사건을 기록한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이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예언서 말씀의 성취라고도 적용한다.

//마태는 그리스도(메시야)의 이름 두개를 설명한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는 의미요,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구원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죄에서 구원할 수도 없고 우리 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으니, 성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구원은 받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다면 믿음이 잉태되었으나 사산하는 꼴이다. 그러니 구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서의 말씀의 핵심은 동정녀가 아니다. 임마누엘이다. 마태는 처녀라는 대신 동정녀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핵심은 잉태한 기간이 지나면, 곧 일년이 안 되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와 함께 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보다 이스라엘에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야 때의 아하스는 기다리지 못했다. 다행히 요셉과 마리아는 기다렸다. //우리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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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7

마태복음 1:1-17 (공동번역)

1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다. 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았으며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을 이새를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까지 짧은 세대에 이방여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나님이 세우실 다윗 왕국이 혈통적으로 순수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왕국이랴. 그래서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은 복음서 1:12-13절에서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성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다. 바울은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하나님의 양자 된 우리 성도의 족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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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14-18

베드로후서 3:14-18 (공동번역)

베드로는 사랑하는 수신자들에게, 마지막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권한다. (이 땅에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것에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화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래 참으신다. 기다림과 화목은 바울로의 편지에서도 나타나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다. 바울로는 어느 편지에서나 이런 말을 하는데, 이해하기 어렵다고,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파멸을 자초하는 속임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주님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이 영생을 누릴 때, 삼위 하느님께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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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완벽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베드로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은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권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순종하지는 못해도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순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이 자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었다고, 곧 소위 ‘구원’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 멈춰 서서는 안 된다. 여전히 (무궁하신)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남아 있다. 이 과정이 영생이다.  //그렇다면 거짓 예언자들과 사탄의 전략은 확실하다.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기쁨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다. 태아가 모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사산과 다름없다. 빛 가운데 행하지 못하고 사산되는 믿음의 생명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ㅠㅠ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탄은 오늘도 거짓 메세지를 전한다.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공동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3:1-13

베드로후서 3:1-13 (공동번역)

베드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들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순수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베르로는 성도들이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신 구세주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계명을 되새기길 원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자들의 조롱과 유혹이다. 자기 욕정에 따라 사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하느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외면한다. 베드로는 하느님이 행하신 천지창조와 노아홍수를 상기시킨다. 사실 지금도 하느님이 섭리로 다스리신다.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보존되지만 천지와 함께 멸망당할 것이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날을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다. 그날에 천지도 없어지고 모든 것이 다 파괴 될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면 답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리며, 그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한다. 성도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정의가 깃들여 있다.

https://quietwaters.blog/2020/12/26/

//주의 재림이 미뤄지는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가르친다. 따라서 마지막 때까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성도들에게는 새하늘과 새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개벽의 새하늘과 새땅에 정의가 깃들여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의 나라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정의롭게 살면 하나님나라의 맛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정의(의)다. 개인의 욕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절제하고 나누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정의)다. 오직 성령의 도움심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베드로후서 2:10b-22

베드로후서 2:10b-22 (공동번역)

하느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당돌하고 거만해서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도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들보다 더 큰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 앞에서 그들을 헐뜯어 고발하지 않는다.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그들은 악인이다.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서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헐뜯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의의 값으로 벌을 받게 된다. 그들은 대낮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성찬의 자리에서도 방탕한 짓을 즐기며 티와 흠을 남기는 자들이다.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끊임없이 죄만 짓고,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그들은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되어 있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는 자들이다.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간 사람들이다. 부정한 소득을 좋아한 발라암(발람)의 길을 따른 사람들이다. 발라암은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음성으로 책망해서야 미친행동을 멈췄었다. 발라암은 물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은 예언자였다. 이런 자들에게는 깊은 암흑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허풍을 떨며 그릇된 생활에서 가까스로 빠 나온 사람들을 다시 육체의 방탕한 정욕으로 유혹한다. 이들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패의 노예다. 부패에게 정복되어 부패의 종으로 산다.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도 부패에 다시 말려 들어가서 정복당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다. 올바른 길을 알았다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낫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목욕 시킨 돼지가 다시 진창에 뒹구는 꼴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0/12/24/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손종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전한다는 뜻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다.ㅠㅠ
//올바른 길을 알았다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좌우로 치우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다. 세상 유혹에 몸이 휘청일 수는 있어도 우리의 발걸음은 궤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다.
//그리스도로 옷입었으면서 진창에 뒹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진창에 뒹굴게 되는 것은 우리의 욕망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