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10-20

마태복음 15:10-20 (공동번역)

읽기1)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서 돌이키시고 군중을 불러모아 가르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위가 상한 것에 괘념치 않으시고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오히려 그들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둘 다 구렁에 빠지는, 눈 먼 자들에 비유했다. 베드로가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간 것은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주셨다.

읽기2)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 자들이라고 심하게 책망하셨다. 그들이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이 주에게서 떠났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하고 군중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신 것을 걱정했으나, 예수께서는 괘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눈 먼 소경에 비유하셨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아가리 닥쳐라!’ 하신 셈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손씻는 문제에 대해 풀어주셨다. 손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결국 손을 씻지 않고 먹은 제자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고 꼬투리 잡으려는 그들의 마음이 악하다고 하셨다.

//깨끗한 것을 먹어야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에 깨끗한 것이 있어야 깨끗하다.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 모독을 행해야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더러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간음이라고 가르치셨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찾은 것은 예수를 죽일 꼬투리를 찾으려는 마음에서니, 그들은 이미 악하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악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돌이켜 마음을 정결케 하는 길은 말씀과 성령 밖에 없다. 손이 아니라 마음을 씻어야 한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임마누엘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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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1-9

마태복음 15:1-9 (공동번역)

예수의 소식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어긴다고 따졌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예로 드셨다. 그들은 ‘하느님께 바쳤다’ 는 말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위선자라고 선언하신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며, 주님을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양 가르친다 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중심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변방 갈릴리의 변화를 인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행보를 율법의 완성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통의 파괴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율법의 정신을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할례가 율법보다 앞서듯이 사실 율법이 전통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전통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문화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전통이든 율법이든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이 율법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이유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부모 공경/봉양을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모공경을 믿음의 식구들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머니요 형제 자매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혈통적 부모와 함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부모들을 봉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전통을 따지는 것은 사람이 만든 계명을 하나님의 것인양 가르치는 꼴이다. 말뿐인 예배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성서를 읽어야 하고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통에 비추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성서를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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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6

마태복음 14:22-36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홀로 남아 군중들을 돌려보내신 후, 조용히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시쯤되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면 자신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었다.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고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였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풍랑이 그쳤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경배했다. 그들이 겐네사렛 땅에 이르자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부근 지방에 두루 사람을 보내 온갖 병자들을 데려왔다. 예수의 옷자락만 만지게 해달라고 청하고 만진 사람은 모두 깨끗이 나았다.

//우리 시각처럼 믿지 못할 감각이 없다. 배 위의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김새나 옷차림이 달라졌을 리 없다.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눈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나마 청각은 조금 더 정직하다. 지문처럼 안 변하는 것중의 하나가 목소리라고 한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예수님은 짠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기 전에 음성으로 안심시키셨다. (말의 내용보다, 목소리가 중요하다.) //우리의 감각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도 믿음을 약화시킨다.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바람으로 옮겨가자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부라고 수영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여간 베드로는 무서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우리도 시선을 예수에게서 돌리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비명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와 함께해야 물에 빠지지 않는다. //배 위의 사람들(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 그래서 아직은 우상을 대하듯 옷자락만이라도 만져 병낫기를 바란다. 시작에 불과한데 여기서 끝내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도 말씀을 마음에 담는다. 성령이라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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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13-21

마태복음 14:13-21 (공동번역)

예수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으나 사람들이 육로를 따라 여러 동네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예수께 군중들을 보내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으 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뿐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군중들을 앉히였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후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광주리에 가득찼다. 먹은 사람은 남자만 해도 오천명 가량 되었다.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은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다. 이제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예언자로 따를 분은 예수님만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였고 예수님은 (의에 굶주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이어지는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께서 의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시는 사건이다.
//한편 제자들은 군중들에게 필요한 것이 육신의 배고픔이라고만 생각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군중들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일단 예수님은 군중들의 시장기를 해결해 주신다. 어떻게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실 수 있는 하나님께 불가능은 없다. 돌들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예수님께 불가능은 없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는 답은 (물론 개인적인 적용이지만) 군중들이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대로 서로서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의를 (옳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천적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또 ‘어떻게’ 라는 장면을 떠올리려고 하면 안 된다. 마지막 장면만을 상상해 보자. 제자들은 각자 가지고 있었던 광주리 가득 먹을 것을 모았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병이어의 조각을 받아 나눠주었는데… 결국은 제자들이 군중들로부터 광주리 한 가득 돌려받은 꼴이다. 성도라면 주변과 서로서로 나워야 한다. 이것이 의다. 옳은 일이다. 하늘나라다.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물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나누지 않고 움켜잡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가, 우리 교회가 나누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오히려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움켜잡으려고만 하니 어쩔꼬… ㅠㅠ 오늘도 교회에서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고 기도한다. 주님은 제자된 우리에게 “너희가 주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오병이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도하고 순종해서 드러내야 할 하늘나라다.

https://quietwaters.blog/2023/02/27/

마태복음 13:53-14:12

마태복음 13:53-14:12 (공동번역)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예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으나, 예수의 혈통을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라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고,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무렵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왕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빌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요한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책망하자 요한을 투옥시켰다. 그러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민중이 두려워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이 돌아왔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 헤로데를 기쁘게 하자, 헤로데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을 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미가 시키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헤로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공개적으로 약속한 일이라 소녀의 청대로 사람을 보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했다. 소녀는 요한의 목을 헤로디아에게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https://quietwaters.blog/2023/02/26/

//우리가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없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유한한 지식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무한한 지혜를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수님 고향 사람들이 그랬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을 주루 다니시며 하늘나라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신다는 소식은 헤롯 왕에게까지 들어갔다. 헤롯은 예수를 자신이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것에 갇혀있기 때문에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믿을지언정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나의 잣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잣대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