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22-29

마태복음 12:22-29 (공동번역)

사람들이 마귀가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자 그는 말도하고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혹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아닐까 수군거렸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며 헐뜯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사탄의 나라가 갈라진 것이요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유지 되겠냐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지 물으셨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신다.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온 증거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성령이 마귀의 두목보다 힘이 세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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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아들 뇌진탕. 일시적 기억상실증

마태복음 12:1-21

마태복음 12:1-21 (공동번역)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셨다. 따르던 제자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고 따졌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다윗 일행이 굶주렸을 때의 일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다윗이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일행과 함께 제공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사제들은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사람이라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면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다른 데로 가셔서 그곳 회당에 들어가셨다.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 양을 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양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예수를 어떻게 예수를 없애버릴까 하고 모의했다. 예수께서는 그자리를 피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고,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예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말씀대로 예수는 이방인들도 그 이름에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이시다.

//한국교회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배)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교회가 빨갱이로 만들어 버리는 이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먼저 입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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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0-30

마태복음 11:20-30 (공동번역)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자, 예수께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등이 대표적인 동네였다.
예수께서는 이방 띠로와 시돈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띠로와 시돈이 심판날에 코라진 베싸이다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가파르나움은 그 교만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 심판날에 가파르나움보다 소돔이 더 가벼울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이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고백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맡기신 이유가 아버지 밖에는 예수를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아버지를 계시하시려고 택한 사람들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예수께 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께 배우면 우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의 멍에는 편하고 예수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동네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의 피리에 맞춰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곡하시는데 따라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무거운 벌을 면할 수 없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다시 가르치신다. 천국복음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하락된 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쉼이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쉼을 얻는다고 하신다. 세상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세상 지혜와 슬기로 따지면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그보다 쉬운 멍에도 없을 것이요 그보다 가벼운 짐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마누엘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02/16/

마태복음 11:2-19

마태복음 11:2-19 (공동번역)

투옥 당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행하는 일을 전해 들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오실 분이 바로 선생님이신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묻게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시며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광야에 있던 요한이야 말로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성서에서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놓으리라’ 하신 말씀이 요한을 가리킨다고 하시며,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 보다는 크다고 하셨다. 12절??.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 예언서가 말하는 다시 오시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라고 하시며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는 예언의 말씀에 바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신다. 세상은 요한의 금식에 대해서는 미쳤다고 하고, 인자는 세리와 죄인하고만 먹고 마신다고 말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요한의 의구심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이미 나타난 결과로 (말씀의 성취로) 답을 대신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한이 예언서에서 말한 다시 온 엘리야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의 성취(결과)는 분명한데 요한은 잠시 흔들렸고, 사람들은 결과를 바로 읽어내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말씀)이라는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같은 잣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요한의 금식도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것도 모두 미친짓이 된다. //말씀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 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도,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말씀이 성취된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잣대마저도 인위적으로 사용하는 잘못을 범한다. 성서도 성령에 붙들려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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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34-11:1

마태복음 10:34-11:1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선언하신다. 부자가 모녀가 고부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된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부모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을 잃고,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이며,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보잘 것 없는 주님의 제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의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르치시고 근방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떠나셨다.

//하늘 나라 복음은 가족간을 이간시키고 심지어 원수가 되게 한다. 그렇다고 믿음을 지키지 위해 가족을 원수 같이 여겨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헌 부대에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육신의 아버지 대신 하늘 아버지를 가족의 머리로 하는 하늘 나라의 복음은 기존 가족관계를 찢어놓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과 상관 없이 모두 가족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늘 나라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이 다른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이것이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 (불신) 가족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님이 받으신 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 아니면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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