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3:29-39

마태복음23:29-39 (공동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과 다르게 예언자들을 죽이는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것은 그들이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이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하신다. 그들이 뱀 같은 자들이며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독설을 뱉으신다. 그들이 조상들처럼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고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잡으러 다닐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모든 무죄한 피 값을 치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이 세대에 내리고야 말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 주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친다. 주님이 자녀들을 몇 번이나 품으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다스림)에 응하지 않으면 성전이라도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양할 때까지 주님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24/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종합하면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였다는 것은 실제로 죽인적도 있겠지만,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예언자들 통해 전해지 하나님의 말씀을 씹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씹은 것이다. 더구나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결국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성들의 불순종도 그들의 책임이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다스림이요, 주님의 나라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성전이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 해진다.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곧 주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는 없다. 주님을 만나는 곳이 하나님나라다. 하늘이다.

마태복음 23:13-28

마태복음 23:13-28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시며 그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책망의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늘나라 문을 닫아놓고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들어가게 막는다. 그들이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킨 후에 그 사람을 자신들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을 만든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눈먼자들이라 부르시며 그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황금이 중요할까? 아니면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 중요할까? 그들은 제단을 두고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제물과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하고 물으신다. 성전의 황금이든 제단 위의 제물이든 결국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한 맹세가 아니냐고 지적하신다. 하늘을 두고 한 맹세도 결국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느님을 두고한 맹세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시며 그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그들이 소득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책망하신다. 소득의 십일조도 바쳐야 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들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눈 먼 지도자라고 하신다. 겉만 깨끗하지 속은 착취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그릇이라고 하신다. 그들에게 먼저 그릇 속을 깨끗이 닦으라고 하신다.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그들을 겉만 그럴싸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다.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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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quietwaters.blog/2023/03/23/

마태복음 23:1-12

마태복음 23:1-12 (공동번역)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위기 위한 것이다. 성서구절이 적힌 카드를 가지고 다니고 커다란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잔치와 회당에 가면 상석에 앉으려한다. 길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22/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왜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되었는가? 물론 나라고 예외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리더쉽세미나가 판치는 세상이다. 지도/이끔 (leading) 이라는 단어대신 영향력 (influence) 이라는 단어로 옮겨가고 있지만 이 역시 세상가치로 따진다. ‘종의 리더쉽’이나 ‘섬김의 리더쉽’이라는 표현도 솔직히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다. 나의 선생님이 누구신지, 나의 주인이 누구신지 분명히 하라고 하신다. //선교지에서도 (아마도 교회에서도) 예수의 제자가 아닌 자신의 제자를 양산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의 지도자도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고. 우리들은 모두 형제자매요, 동학/동문들이다. 성도들끼리 믿음의 선후배가 있을 수는 있으나 선생과 제자 사이는 없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우리 모두가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대신 스스로가 선생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분파로 나뉘지 않던가! 권위는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사는 것이다. 말로는 살 수 없고 본을 보이는 행실로만 살 수 있다.

마태복음 22:34-46

마태복음 22:34-46 (공동번역)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는 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가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가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한 둘째 계명이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의 자손이겠는지?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시며 시편을 언급하셨다.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꿰뚫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온 율법(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하셨다. 예수님이 정리해 놓으신 답을 보고나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방대한 분량을 짧은 두 문장으로 줄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지 물으신다. 역공이다. 온 율법을 짧은 두 문장으로 줄이는 것보다 쉬워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노래한 시편을 놓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명에 유구무언이었다. 다윗의 노래를 몰라서가 아니다. 성령의 감화 문제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성경/성서를 읽을 때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새로 나야 (거듭나야) 한다. 그냥 전통에 따라 성서를 읽는데 무슨 질문이 있을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성서에 대한 참고서였다. 참고서에 나오지 않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질문이 있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할 능력까지 구해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21/

마태복음 22:23-33

마태복음 22:23-33 (공동번역)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만약 칠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을 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어서 둘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다. 둘째에서 일곱째까지도 다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다.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너희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몰라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고 지적하셨다. 부활한 다음에는 결혼하는 일이 없이 하늘의 천사들처럼 된다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현재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탄복했다.

//성도는 죽으면 부활의 삶을 산다. 죽은 뒤 한참 있다가 (예수님 재림과 함께) 부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죽은 후 즉시다. 그래서 살아서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에 잇대어 그 즉시 부활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다만 시공의 단절이 있어 이땅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이땅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땅에서 하늘로 시공을 건너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렇다고 육적인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이 땅에서도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낮아지고) 굶주려도,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을 이루고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리에 서면 하늘의 복을 맛보는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