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8-40

열왕기상 1:28-40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밧세바에게 한 맹세에 대한 이행이라고 기록한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자라는 별칭을 가진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기로 밧세바에게 맹세한 것은 다윗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고 나단이 그 증인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본문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ㅠㅠ)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이 맹세도 잊어버렸는데 나단이 상기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라는 다윗의 명령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란다고 아멘으로 화답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다웠다고나 할까?) 나단과 사독과 브나야의 관심도 다윗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들은 다윗의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던 것 같다. //군대장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선 상황에서 친위대장의 브나야가 솔로몬 편에 선 것은 군사적 힘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 여호야다(여호와께서 알고 계심)의 아들 브나야(여호와께서 세우심)의 역할이 중요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9/03/

열왕기상 1:11-27

열왕기상 1:11-27

//나단이 아도니야 편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심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단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내리신 것을 다윗에게 전달한 당사자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말라기서(말1:2)에서 주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고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택하신다. 그렇다면 다윗의 많은 아들 중에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맞다고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출생서열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신이 막내였음에도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야에 대한 살인 후에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의 회개를 받으셨지만 그래도 다윗은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자비)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데… 지금의 다윗의 무기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면 천하의 디윗이라도 소용없다. 직접 하나님과 교제했던 다윗, 나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했던 다윗, 이제는 그 고리마져 끊어져 버린 상태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 말씀 읽기와 기도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 끊어지는 순간 사망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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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10

열왕기상 1:1-10

//늙은 다윗. 신하들이 수넴 처녀 아비삭을 품에 안겨 주었어도 잠자리를 같이 못하는 다윗. 경건해서가 아니라 무기력하다는 증거다. 다윗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시편기자의 노래에 의하면 인생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백이십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은 모세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무기력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왕이 무기력하자 신하들이 설친다. 왕을 위해 이스라엘 사방 영토내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구했다는 것은 이방나라에서나 행하던 방법이 아니었나? 하여간 하나님의 사람이 무기력하면 하나님의 방법이 무기력해 진다.
//아비가 무기력하자 아들이 설친다. 오냐오냐 하고 키웠던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이방나라의 관례에 따르면 서열상 아도니야가 다음 왕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 세상의 서열을 따르시던가?
//지도가가 무기력하자 편이 나뉜다. 지도자가 무기력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한 편이 되어 다음 지도자를 구해야 할 신하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후계자 편에 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진 결과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지면 결코 바른 길로 갈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무능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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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마태복음 28장

// 와서 보라. 예수께서 자기를 따라온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둘 중 하나는 안드레였고 그는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로 이끌었다. 빌립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던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했다. 우물가에서 메시야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마을 사람들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증거한다.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와서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부활의 새벽 무덤을 찾은 두 마리아에게 천사가 한 말이다. 천사는 그리스도의 시체의 부재를 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재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두 마리아가 빈 무덤을 확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마리아는 천사의 전한 말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급히 무덤을 떠났다. //와서 보라! 우리가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셨으니 ‘와서 예수를 보라’ 하고 말할 수 없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와서 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라고 하신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하신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라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가족됨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유일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부활에 참여하는 삶이다. 영생이다. 부활절 아침이다.

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57-66 (공동번역)

날이 저물었다. 예수의 제자 아리마태아 사람인 부자 요셉이 와서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지 빌라도는 쾌히 승낙했다.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하고 고운 베로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신 다음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놓고 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명절을 준비하는 날이 지나고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사흘이 되는 날 까지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어줄테니 잘 지켜보라고 말했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다. 

//예수의 시체를 거둔 요셉. 아리마대 사람이요 부자요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부자는 요셉의 소유에 관한 설명이요, 제자는 요셉의 삶에 관한 설명이다. 영생을 구하던 청년처럼 부자들은  예수보다는 돈을 따르는 돈의 제자가 되기 쉽다. 그런데 요셉은 부자였지만 돈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마태는 제자라는 명사형 대신 ‘따르다/배우다’ 라는 동사형으로 요셉의 제자됨을 기록한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자기 무덤에 장사했다. 밤이 되면 산 위의 동네가 환히 드러나듯,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 요셉은 짠 맛을 잃지 않았기에 빛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여인들이 그 빛의 증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에 주목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은 흩어졌는데도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들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 만큼 부활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사건이다. 단순한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냥 소생이 아니라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도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