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24-33

예수님은 청출어람을 옛시인의 허사라고 말씀하신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기껏해야 선생만큼 되고 상전같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선생이나 주인보다 못한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 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축귀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천국복음을 전파하면 당연히 귀신의 종을 의지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천국의 비밀도 결국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이땅에 빛으로 오셨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바로 이 빛이 예수님이시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요 1:18 공동번역)

그래서 내가 선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청출어람이 없겠지만 세상에는 청출어람이 허사가 아니라 실사가 된다. 우리끼리는 누가 선생이고 누가 제자가 아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되신 예수님이 빛으로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추수꾼들(제자들)은 빛에 대해 증언한다. 빛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광명한 데서 증언한다. 예수님이 비유로 (어둠가운데) 가르치신 천국복음을 제자들에게는 (밝은 가운데)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천국복음전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양들이 이리가운데서 해야 하는 일이다. 추수꾼들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쳐주신다.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추수꾼으로 (제자로) 인정하신다고 하신다. 만약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없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보혜사 성령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마태복음 10:16-23

추수밭에서 일하는 것은 예수님께 치유와 축귀와 회복의 권능을 받아도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한마디로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다.

// 천국복음을 가졌다고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다. (요 16:33)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신다. 세상을 이기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그렇지만 담대하라고.

이리 같은 세상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수꾼들을 공회에 넘겨 유죄를 받게하려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것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천국복음을 증거할 기회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천국복음은 환난가운데 증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쩌다 재수 없으면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천국복음전파는 고난이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천국복음전파를 하기 위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 세상의 모든 방법을 써야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세상에 책잡힐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더욱더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뱀같이 지혜로운면서도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는 어렵다.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당연히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 한명한명과 물리적으로 가시적으로 함께 하실 수 없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다.

이리들 가운데 다툼과 살인이 창궐할 것이라고 하신다. 가족관계마져 무너진다. 이리들 가운데서 양으로 (순결한 삶을 살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구원의 약속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근거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하신다. 이동네에서 박해하거든 저동네로 피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실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신다. 제국주의적 복음에 익숙한 우리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라고 가르치고 배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르다. 물러나라고 하신다. 진것 같아도 담대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나도 이기고 싶으면 예수 안에 거하면 된다. 임마누엘이다. 괜히 내가 이기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다. 아버지의 성령을 모셔야 한다. 예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누려야 한다.

오늘도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소서.

마태복음 10:1-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하셨다. 그 기도의 응답은 제자들 자신이 추수꾼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제자 열둘을 부르셔서 추수할 때 필요한 도구, 즉 축귀와 치유와 회복의 권능을 주셨다. 열둘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추수꾼이 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특별한 자격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추수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추수꾼이 되라고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열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나나인) 그리고 가룟 유다 였다.

예수님은 이 열둘을 파송했다. 이들에게 이방인들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축귀와 치유와 회복의 도구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고 하셨다. 병든 자는 고치고 죽은 자는 살리며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하셨다. 열둘이 받은 것은 무엇인가? 저들이 받은 것이 천국이다. 예수님의 권능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준 권능외에 다른 것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행에 필요한 돈도, 배낭도,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다. 천국복음을 전파하면서 합당한 자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그 집에서 머물라고 하신다. 영접하지 않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돌아나오라고 하신다. 영접하지 않는 곳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이사야는 환상중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기도하면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열둘에게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권능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제자의 길은 끊임없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길이다. 열둘 중의 한명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자라고 기록된다. 언젠지는 모르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칠십인 전도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 권능을 받고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 임마누엘이다.

수많은 무리에서 열둘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는 결국 짤려 나갔다. 임마누엘을 누리는 자는 많지 않다.

마태복음 9:27-38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맹인들은 집에까지 따라들어왔다. 예수님께서는 두 맹인에게 (마태는 둘이라는 숫자를 정말 좋아한다.) 믿느냐 물으셨고 두 맹인은 네하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저들의 믿음대로 고쳐주셨다. 믿음은 눈을 밝게한다.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깨닫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머무시던 집에 증인들도 여럿 있었을 것이니 이 사건을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전파했다.

그들은 나갔지만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축귀하셨고 말못하던 사람은 말하게 되었다. 무리들은 놀랍게 여겼다. 무리중에 있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위지하여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다시한번 4장 23절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다. 천국복음이다. 귀신의 왕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모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대신 병과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목자, 통치자가 아니셨다. 그러니 그들은 고생하고 기진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곳이 무궁무진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백성이 적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추수꾼은 아무나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추수하는 주인, 즉 하나님이 세우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백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 졸립다.

마태복음 9:14-26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저들의 질문에는 예수님도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찌 알리요.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며 40일 동안 온전한 금식을 하셨던 분이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기도 금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감히?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예수님께 도전을 하다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다. 금식은 나는 죽고 온전히 주님만 사는 행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그래서 나의 삶을 주님께 위임하는 행위다. 따라서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시는 예수님도,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는 제자들도 금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임마누엘은 결혼잔치라고 하셨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에는 금식해야 된다고 하셨다. 만약 신랑되신 주님 뜻 대신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에는 금식해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천국을 하나님나라를 임마누엘이라고 설명하신다. 이것은 새포주를 새부대에 담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랑을 율법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새포도주를 옛부대에 담는 것이다. 잘못하면 율법의 참뜻도 사라지고 사랑도 잃어버리게 된다. 새포도주는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이다. 그리고 새부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을 행할 수 있다.

관리의 딸의 부활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의 치유는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담는 예다. 관리가 와서 내 딸이 방금 죽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시면 낫겠다고 요청한다.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을 고쳐주시러 길을 가실 때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에수님의 겉 옷만 만져도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 관리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물리적 접촉을 통한 임마누엘을 원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사람들은 임마누엘의 능력을 비웃을지 몰라도 임마누엘이야 말로 능력이다. 임마누엘의 능력을 믿음으로 관리의 딸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임마누엘을 누렸다. 그리고 그 소문이 그 온땅에 퍼졌다. 임마누엘은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한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에는 임마누엘이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더 이상 모실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돌보신다. 대신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 무엇인가.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주님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말씀이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임마누엘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임마누엘을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