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2:1-11

에필로그는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개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주님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었다. 주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셔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바벨론 손에 넘겨주신 이유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시드기야는 당연히 주님이 선도부로 세우신 바벨론을 배반한다. 척화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성전도 시드기야의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피난처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포위로 예루살렘 성은 피난처가 아니라 감옥으로 변했다. 결국 안으로는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밖으로는 바벨론이 성벽을 파괴했다.

시드기야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지만 바벨론 군에 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선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데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

예레미야서 기자는 왜 시드기야의 이야기로 에필로그를 시작할까? 시드기야에게는 주화파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 선도부 바벨론 왕을 배반하지 말아야 했다. 더군다나 포위당한 기간이 1년 반이나 되었다. 이 기간동안이라도 주화파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가두었지만 자신이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에 갇혔다는 것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시드기야는 사로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섰다. 주화파의 조언에 따라 항복을 해야하는데 눈을 부릅뜨고 배반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결국 장님이 되어 죽는 날까지 바벨론에서 옥살이 했다. 주님의 말씀을 주화파의 생각으로만 치부하고 순종대신 척화파의 편에 선 시드기야의 삶의 결국은 유다의 종말을 대변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갇혀 사는 이유도 주화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보지 못하고 세상과의 타협으로만 보기 때문은 아닐까?

바울은 권면한다.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심지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몸부림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미 진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구한다.

예레미야 51:54-64

바벨론이 멸망한다. 바벨론이 이제사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파멸을 피할 수 없다. 도처에서 파멸의 소리가 들린다. 주님은 바벨론의 교만한 목소리를 쑥 들어가게 하셨다. 대신 주님이 새로 세우신 선도부 나라는 많은 물 같은 큰 소리를 친다.

바벨론이 꺾였다. 주님은 보복의 하나님이시다. 반드시 보응하신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바벨론의 지혜자들, 바벨론의 관원들을 취하게 하시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하신다. 결국 바벨론은 자신들의 교만에 취해 패망한다. 폐망한다. (싸움에도 지고 쇠잔한다.)

바벨론의 패망과 폐망에 대한 예언은 유다땅에 남은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가는 병참감 스라야에게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주고 바벨론에 가서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바벨론의 패망을선언하라고 했다. 그리고 예언을 다 읽었으면 기록된 말씀을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속에 던져 바벨론의 폐망이 어김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시연하라고 하였다.

예레미야의 말이 끝이 났다.

// 세상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가방끈이 길어도, 권력를 쥐었어도 그들을 교만에 취하게 하시는 주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와 자비로 다스리신다.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주님이시다. 예레미야가 40년동안 전한 메세지는 너무 간단하다. 주님은 반드시 보응하신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지, 누구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지 분명하다. 역사적 사건을 제외하면 예레미야서는 정말 읽어나가기 힘들정도로 단순한 말씀의 반복이다. 그만큼 순종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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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이 패망한다. 이제사 바벨론도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바벨론에서는 파멸의 소리만 들린다. 바벨론의 교만한 목소는 쑥 들어간다. 대신 주님이 새로 세우신 선도부 나라가 마치 자신이 주님인양 많은 물소리를 낸다.

주님이 세우셨어도 세상에서 선도부 나라의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흥하고 교만에 취해 패망하고 주님은 다시 새로운 선도부 나라를 세우시기를 반복하신다. 주님의 나라가 선도부나라가 되기까지 반복될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를 가르쳐주셨다. 주님의 나라는 교만이라는 술에 취해 패망 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대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나라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도간에 피차복종하는 겸손한 나라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주님의 나라라 해도 사사시대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의 나라는 망치로 선도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사랑으로 해야한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길이다

 

예레미야 51:45-53

나의 백성아! 나의 백성아! 나의 백성아! 가슴을 울리는 주님의 부름을 귀로 듣는다면 어떨까?

주님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각기 주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신다. 바벨론 패망 소식으로 마음을 나약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 편에 서서 싸우지 말라는 경고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의 패망은 주님이 바벨론의 우상을 벌하시는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백성들이 동일시 된다면 마찬가지로 바벨론 백성과 바벨론 우상도 동일시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의 우상들이 벌받는 것을 바벨론 온땅이 치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백성 모두가 죽는다고 말한다. 천지 모든 만물이 주님이 바벨론의 패망을 기뻐 노래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바벨론은 망치가 되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굴복시켰다. 이제 바벨론이 굴복당할 차례다. 그러니 바벨론의 망치에서 살아남은 자들아 머뭇거리지 말고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바벨론에서 떠나 주님을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주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하다가 바벨론에게 수치를 당한 곳이다. 주님의 백성들이 창피함을 당한 곳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시한번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수치와 창피는 이제 바벨론 차례라고 하신다. 바벨론이 하늘 높은 곳에 피난처 요새를 쌓아도 소용이 없다. 결국의 멸망의 산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어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피난처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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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의 날이라 캄보디아는 쉰다. 12월에 있는 단 하루 공휴일이다. (불교국가라서 성탄절은 공휴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나의 백성아’로 시작한다. ‘나의 백성아’만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가슴으로 울리는 주님의 음성이 귓전에도 울려지길 소망하면서. 읽고 또 읽고.
 
바벨론은 하늘까지 닿을 듯한 요새를 쌓아 피난처를 삼아보겠지만 주님이 보내는 심판자를 막을 수 없다. 결국 바벨론이 (힘과 부요람으로) 쌓은 요새는 멸망의 산이 되고 만다. 주님은 나의 백성에게 바벨론에 끌려 싸움터에서 방패막이가 되지 말고, 대신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영화로왔던 성전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당한 수치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에 마음을 두라는 것은 주님의 경고와 약속을 기억하라는 뜻이리라. 불순종은 패망이요 순종하는 자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뜻이리라.
 
(렘51:45-53)

예레미야 51:33-44

(만국이 의지하던) 어미 바벨론이 딸 바벨론이 되었다. 바벨론은 만국을 이끌 선도부로 사용되었는데 교만이 하늘에 치달았다고 주님은 평가 하신다. 바벨론의 교만을 주님은 나를 먹으며, 멸하며, 주님의 것으로 배를 채우고 주님을 쫓아 내었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폭행과 학대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을 동일시 하신 것이다. 11절에서 주님은 주님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결국 구약에서도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성전은 같은 의미다. 다시말해 주님이 주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는 것, 임마누엘이 곧 성전이다. 성도들의 모임,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백성들은 바벨론의 악행을 행한대로 갚아달라고 주님께 송사할 것이고 주님은 백성들의 송사를 들으실 것이다. (바다같이) 많은 물가로 축복하셨던 주님은 바벨론을 사람이 살 수 없도록 그 근원까지 말라버리실 것이다.

더 이상 열방은 바벨론을 어미처럼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무너진 바벨론에 의지할 민족들은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 51:20-32

바벨론은 자신의 행위대로, 분쇄하고 분쇄하고 분쇄한대로 심판받는다. 그들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서라고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모든 악을 행한대로 주님께서 갚으신다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의 멸망을 노래하면서 바벨론을 멸망의 산이라고 부른다. 산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곳이다. 시편 121편 기자도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든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시편기자의 결론은 우리가 아는대로 도움은 오직 천지의 창조주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 바벨론은 결코 사람들의 의지가 되는 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멸망의 산이다.

분쇄하고 분쇄하고 또 분쇄하는데 사용되었던 망치 바벨론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어김이 없다. 메대가 새 망치가 되어 바벨론을 칠것이고 바벨론은 황폐해져서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것이다. 바벨론의 군사들은 결국 바벨론이 함락되었다는 말밖에 달리 바벨론 왕에게 전할 말이 없을 것이다.

// 우리의 삶은 마라톤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우리의 왕에게 패망이 아니라 완주를 보고해야 한다. 완주하면 주실 면류관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분쇄할 것 같았던 막강한 망치인 바벨론 (부와 힘)을 바라보고 달려가면 그 결국은 멸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