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는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개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주님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었다. 주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셔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바벨론 손에 넘겨주신 이유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시드기야는 당연히 주님이 선도부로 세우신 바벨론을 배반한다. 척화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성전도 시드기야의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피난처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포위로 예루살렘 성은 피난처가 아니라 감옥으로 변했다. 결국 안으로는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밖으로는 바벨론이 성벽을 파괴했다.
시드기야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지만 바벨론 군에 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선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데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
예레미야서 기자는 왜 시드기야의 이야기로 에필로그를 시작할까? 시드기야에게는 주화파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 선도부 바벨론 왕을 배반하지 말아야 했다. 더군다나 포위당한 기간이 1년 반이나 되었다. 이 기간동안이라도 주화파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가두었지만 자신이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에 갇혔다는 것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시드기야는 사로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섰다. 주화파의 조언에 따라 항복을 해야하는데 눈을 부릅뜨고 배반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결국 장님이 되어 죽는 날까지 바벨론에서 옥살이 했다. 주님의 말씀을 주화파의 생각으로만 치부하고 순종대신 척화파의 편에 선 시드기야의 삶의 결국은 유다의 종말을 대변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갇혀 사는 이유도 주화파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보지 못하고 세상과의 타협으로만 보기 때문은 아닐까?
바울은 권면한다.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심지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몸부림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미 진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