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21-30] 어둠속으로

[요13:21-30] 어둠속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 예수님은 심령에 괴로워 하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서로 의심하였다.[22] ‘의심하였다’라는 동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 쓰이는 단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에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제자들은 자신들중 하나가 누군지 궁금해서 답답했을 것이다.

요한은 당시의 사건을 기록하며 우리에게 그 하나가 가룟 유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미 앞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함께해 온 제자들. 그들끼리도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관계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속은 알 수 없다.’ 내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럼 누구지?

제자 하나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있었다.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드러내셨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악역! 가룟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밤이었다. 밤은 어둠을 상징한다.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 예수님은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12:36]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의 품을 떠나 어둠속으로 나갔다.

// 아론과 미리엄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미리엄이 문둥병 벌을 받았다. 모세의 중보로 바로 나음을 입었지만 미리엄은 이레 동안 진 밖에 갇혀야 했다.[민12] ‘안’이 아니라 ‘밖’에 갇혔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죄의 세상에 갇히는 것이다. 마치 자유를 향해 나가는 것 같지만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다. 더이상 ‘절대진리’는 없다고 하면서 다를 뛰쳐 나간다. 그러나 다들 자신이 어디로 나가는지 알까? 어둠으로.

답답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예수님 가슴에 바싹 기대어 있는 것이 좋다.

[요13:12-20] 섬김과 종

[요13:12-20] 섬김과 종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

나는 선생이고 주인이다. 너희는 제자고 종이다. 클라스가 다르다. 우리는 클라스의 차이를 안다. 누가 ‘청출어람’이라고 했던가? 종이 주인보다 클 수 없고 당연히 제자는 선생보다 높을 수 없다.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가르치신다.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대로 세상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 누르고 ,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큰자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종이 되어야 하다고 하셨다. (마20:25-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이다.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종이 으뜸된 사람이다. 섬김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어라, 종이 되어 으뜸이 되어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행하라고 본을 보이셨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섬김’이라는 단어에는 거부감이 없지만 ‘종’이라는 단어에는 거부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자는 우리의 행동을 후자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생으로, 또 주인의 신분으로 섬기길 원하지 종의 신분으로 섬기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령하신다. 시중드는 자가 되라 (행동). 종이 되라 (신분).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신분까지 변화되길 원하신다.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시중을 드신 예수님. 종처럼 행동만 하신 것이 아니다. 주인의 명령이면 죽기까지 복종해야 하는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이 성자 하나님을 성부하나님께서 으뜸이 되게 하셨다.

난 늘 천국잔치를 꿈꾼다. 예수님께서 허리를 동이고 나를 식탁에 앉혀주시고 시중드시는 그 잔치를. 이땅에서 내가 예수님 역할을 해보면 어떨까?

[요 13:1-1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1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예수님의 사랑에는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자기 양을 사랑하신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을 사랑하신다. 이 사랑에는 다함이 없다.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의미는 무궁무진하게 사랑하신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누가복음 12: 36, 37]

오늘 본문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종들을 시중들 것을 미래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종인 제자들에게 그렇게 행하셨다. 제자들이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증거일 것이다.

깨끗하지 않은 가롯 유다! 끝까지 사랑받아야 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뛰쳐 나왔다. 선한 목자의 음성대신 다른 소리를 따라갔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시 1:1] 오늘도 주님은 말씀으로 나의 발을 씻기신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요 12:44-50] 참 빛 = 영생

[요 12:44-50] 참 빛 = 영생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오셨다. 모든 빛은 근원이 있다. 우리는 달이 그 자체로는 빛이 없고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보여준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보는 별들도 지금 현재의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분전 심지어 몇년전 별에서 온 빛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별들의 실체는 오직 과거뿐이다.

그런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요1:9] 이 참 빛은 성자 하나님으로 그 근원이신 성부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1:18] 단순히 과거의 하나님을 보여줄 뿐아니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찰라 (한순간)의 간격도 없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성부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셨다. 성부와 성자의 말씀에는 차이가 없다. 그대로다.[50] 예수님은 그 명령대로 사셨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명령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선언하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때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26]), 어둠에 거하지 않게 된다. [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아멘

[요 12:34-43] 우상숭배

[요 12:34-43] 우상숭배 –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

죽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그것도 한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까지 드시면서 설명했는데도 무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율법의 해석이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이셨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라고 하셨을 때나 무리들이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사용된 ‘들리다’라는 동사는 죽음과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낮은데서 높아진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때가 왔다”[23]라는 예수님이 말씀과 연결된다. 이 인자가 누구인가? 눈앞에 보고도 모르는 것을 요한은 이사야서 말씀으로 설명한다.

그레고리 비일은 그의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에서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닮아간다고 적었다. 그는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 6장 9,10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네가 우상을 좋아하느냐? 네가 그것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내가 너희를 그것처럼 되도록 해 주겠다. 우상은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영적인 생명도 전혀 없다. 따라서 너희가 절하는 그 우상처럼 너희도 영적으로 감각없고 생명력 없이 될 것이다.”

금방 탄로날 거짓을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성서도 우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은 우상이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다.

*"We Become What We Worship – A Biblical Theology of Idolatry", Gregory K. Be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