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1-1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1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예수님의 사랑에는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자기 양을 사랑하신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을 사랑하신다. 이 사랑에는 다함이 없다.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의미는 무궁무진하게 사랑하신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누가복음 12: 36, 37]

오늘 본문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종들을 시중들 것을 미래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종인 제자들에게 그렇게 행하셨다. 제자들이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증거일 것이다.

깨끗하지 않은 가롯 유다! 끝까지 사랑받아야 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뛰쳐 나왔다. 선한 목자의 음성대신 다른 소리를 따라갔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시 1:1] 오늘도 주님은 말씀으로 나의 발을 씻기신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요 12:44-50] 참 빛 = 영생

[요 12:44-50] 참 빛 = 영생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오셨다. 모든 빛은 근원이 있다. 우리는 달이 그 자체로는 빛이 없고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보여준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보는 별들도 지금 현재의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분전 심지어 몇년전 별에서 온 빛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별들의 실체는 오직 과거뿐이다.

그런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요1:9] 이 참 빛은 성자 하나님으로 그 근원이신 성부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1:18] 단순히 과거의 하나님을 보여줄 뿐아니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찰라 (한순간)의 간격도 없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성부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셨다. 성부와 성자의 말씀에는 차이가 없다. 그대로다.[50] 예수님은 그 명령대로 사셨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명령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선언하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때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26]), 어둠에 거하지 않게 된다. [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아멘

[요 12:34-43] 우상숭배

[요 12:34-43] 우상숭배 –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

죽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그것도 한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까지 드시면서 설명했는데도 무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율법의 해석이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이셨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라고 하셨을 때나 무리들이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사용된 ‘들리다’라는 동사는 죽음과 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낮은데서 높아진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때가 왔다”[23]라는 예수님이 말씀과 연결된다. 이 인자가 누구인가? 눈앞에 보고도 모르는 것을 요한은 이사야서 말씀으로 설명한다.

그레고리 비일은 그의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에서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닮아간다고 적었다. 그는 본문에 인용된 이사야 6장 9,10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네가 우상을 좋아하느냐? 네가 그것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내가 너희를 그것처럼 되도록 해 주겠다. 우상은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영적인 생명도 전혀 없다. 따라서 너희가 절하는 그 우상처럼 너희도 영적으로 감각없고 생명력 없이 될 것이다.”

금방 탄로날 거짓을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성서도 우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은 우상이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다.

*"We Become What We Worship – A Biblical Theology of Idolatry", Gregory K. Beale

[요 12:20-33] 하나님의 자녀

[요 12:20-33] 하나님의 자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섬긴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시중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26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종(시중드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의 종도 함께 있다. 예수님의 종이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가 된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면 성부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하신다.

선한목자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10:16]이라고 말할 수 있는 헬라인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님을 ‘뵈옵고자’ 했다. 헬라어로는 ‘에이도’ 즉 예수님을 ‘알고’ 싶어했다. 다른 양들이 선한목자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는 소식에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영광과 어울리지 않는 죽음을 언급하신다. 영광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반전을 거듭한다. 하나의 죽음이 많은 생명으로 열매 맺는다. 살려고 하면 생명을 잃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을 얻는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역시 죽음을 면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소명이셨기에 순종하시고자 하셨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시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본을 보이신 것이다. 순종밖에 없다.

예수님의 순종은 참된 권세가 성부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한다. 세상의 임금도 어쩔 수 없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 성자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순종을 성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귀히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으랴!

[요 12:12-19] 호산나

[요 12:12-19] 호산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나갔다. 예수님이 보이기도 전에 저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 (오 구원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통치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 저들은 웅성웅성 대었을 것이다. “죽은자도 살리시는 분이래. 그분이 우리를 로마의 통치에서 구해 주실거야.” “맞아요, 나는 그분이 무덤에서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무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무리들의 뜨거운 반응에 바리새인들은 온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자조한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현상수배했던 포스터가 대선 주자 선거포스터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저 멀리 나타나시는 예수님!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위풍당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호산나의 외침은 잦아들 것이다. 시온의 딸들 처럼 무리들도 두려움에 빠져들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일까 의구심이 회자될 것이다.

호산나. 오 구하소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우리 주님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시는 분이시다. 물에 뛰어들어 우리를 구해 주시려고 왕의 옷을 벗어 던지셨다. 그런데 우리는 물에서 건져주심보다 그 후에 보따리도 주실 수 있는지 없는지에 더 관심이 많지는 않은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ㅠㅠ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가오” (외모)가 아니라 호산나 구원자로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