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3:1-13

이사야 43:1-13

야훼께서 귀머거리요 소경 된 자와 같은 주의 종,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만드신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건져주시고 지명하여 부르셨고 주님의 소유라고 선포해 주신다. 거센 물결을 건너도 휩쓸리지 않고, 불속을 걸어가도 타거나 그을리지 않도록 보살펴 주신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느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집트와 에디오피아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여기셔서 목숨까지 내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보살펴 주신다고 하신다. 세상 어디에 흩어져 있어도 불러모아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 그들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며, 야훼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신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지만 만국 백성을 주님 앞에 불러모으라고 하신다. 그들 가운데 이 일을 알자가 없다고 하신다. 이 일을 알려줄 신들이 없다고 하신다. 오직 주의 백성만이 주님의 증인이라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종으로 세운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을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참 하느님이심을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이 아니시다. 주님 곧 야훼가 구세주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은 이 일의 증인이라고 야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처음부터 야훼 밖에 없었다. 야훼께서 하시는 일을 아무도 뒤집을 수 없다고 하신다.

이사야 43:1-13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길에도 거센 물결과 화염과 같은 환난이 없지 않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환경적으로 두려움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불러낸 주의 백성에게도 두려움은 닥친다. 그러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 임마누엘이 두려운 환경에서 위로가 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은 두려운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생명이 없는 우상이 무엇을 알려주거나 구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역술가 점술가를 찾아봐야 헛될 뿐이다.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며 말씀대로 일을 이루시는 분은 우리가 믿은 하나님 밖에 없다. 주의 백성이 이것을 깨달아 언약에 순종할 때, 열방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종으로 선택받았지만 귀머거리요 소경이 되어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은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나중까지 홀로 참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이 되셔서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믿는) 성도에게도 이 증인의 삶이 요구된다.

이사야 42:1-17

이사야 42:1-17

주님께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그것도 주님께서 신뢰할 수 있는 종이요, 주님 마음에 드는 종이 있다고 하신다. 심지어 주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는 종이다. 주님의 종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소리지르지 않고도 일을 한다. 상한 갈대지만 잘라버려지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 같지만 완전히 꺼지지 않는 종이요,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는 종이다.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는 종이다.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창조주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다. 야훼께서 당신의 종을 부르신다. 정의를 세우라고 부르신다. 야훼께서 종의 손을 잡아 지켜주시고, 종을 세워 인류와의 계약을 맺으시며, 종을 만국의 빛으로 삼으신다. 주님이 종에게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라고 명하신다. 주님이 자신의 이름이 야훼라고 알려주신다. 주님이 자신이 받을 영광을 우상들에게 돌릴 수 없다고 반문하신다. 말못하는 우상과 달리 이전 말씀을 성취하신 주님은 새로운 일도 미리 알려주신다. (그러니)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신다. 온 땅 구석구석 찬양소리가 울려퍼지게 하라고 명하신다. 모든 피조물들도 환성을 올리라고 명하신다. 야훼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신다. 야훼께서 위풍당당하게 나서신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말없이 참으셨지만 초목을 시들게 하시며, 강물은 말라 사막이 되게 하시며, 호수도 말라 그 갈라진 바닥을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낯선 길 가는 소경의 손을 잡아주고, 가본 적이 없는 오솔길을 살펴주고, 캄캄하던 잎길을 환히 트이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험한 길은 탄탄대로가 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결코 중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사야 42:1-17
//하나님이 지칭하는 ‘나의 종’은 누구인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런 종의 모습으로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주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에 주님이 믿어주시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종으로 사셨다. 우리 역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면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종의 모습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 비유한다. 주님의 종이면 뭐 대단한 모습이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 같다고 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라고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꺼질듯 하지만 결코 꺼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신다. 위대하게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낙담하지 않고 바르게 살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정의다. //주의 종은 자신이 받은 정의를 세워가는 사람들이다.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른 길, 곧 주님의 길을 세상에 펴는 (세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도 주의 종으로 살라고 명하신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사야 41:21-29

이사야 41:21-29

창조주 야훼께서 열방에게 논쟁할 것이 있으면 가지고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열방에게 미래 일을 아느냐고 물으신다. 야훼의 신적 권위에 도전하려면 장차 될 일을 말해보라고 물으신다. 미래 일을 말할 수 있다면 모두 놀라며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며, 열방이 하는 일은 헛것이며, 열방이 섬기는 신도 혐오스러운 존재일 뿐이라고 하신다.
야훼께서는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오게 하실 것이다. 야훼께서 지명하여 부른 그 사람이 세상 통치자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어떤 우상도 이 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일러준 자도 들려준 자도 없었다. 야훼께서 비로소 이 소식을 시온에 알려주셨다. 예루살렘에 희소식을 전할 자를 보내셨다. 세상 누구도, 우상들도 말하지 못하고 야훼의 질문에 답을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우상들은) 모두 허수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이요 허공일 뿐이다.

이사야 41:21-29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상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는다.) 앞서 읽었듯이, 우상은 사람들이 못으로 고정시키지 않으며 기우뚱 거리는 존재다. 주님께서 조롱하시듯 장래일도 과거일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다. 벙어리라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명이 없다. 오직 만군의 주 하나님만이 북쪽에서 세상 정복자를 일으키시고, 동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오게 하시는 분이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벙어리 우상들과 구별된다. 시온에서 법을,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국지적 하나님이시면서 섭리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우주적 하나님이시다.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벙어리 우상으로 대하는 어리석은 자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되어도 들은 것이 없는 것처럼 반응한다. 만약 사람이 만든 우상이 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자기 음성을 듣는 것이다. 우상이 말할리 없기 때문이다. 우상은 바람이요 헛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우상을 찾는 이유는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를 주장하고 싶어서다. 심지어 삼위 하나님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이다. 주님을 가르치려는 종교지도자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어리석은 종교지도자들의 허언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다스림(말씀)에 순종하자.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잠잠하자.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소식이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면 어리석은 자요 듣고 행하는 자를 지혜롭다 하신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곧 임마누엘이다.

이사야 41:1-20

이사야 41:1-20

야훼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열방을 향해 논쟁해보자고 제안한다.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켜 세워 제국을 건설하게 했는지 묻는다. 누가 역사의 주관자인지 묻는다. 그리고 야훼께서 바로 자신이 세상 끝날까지 역사의 주관자라고 선언하신다. 열방은 주님 앞에 두려워 떨며 나아온다. 주님은 대장장이들이 만든 쇠붙이 우상과는 다르다. 우상은 못을 박아 고정해야 설 수 있는 존재들이다. (스스로 못 선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종이요, 자신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노래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땅 끝에서 데려와서 세웠는데 버리겠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야훼께서 그들의 하느님이요 그들의 힘이요 그들의 도움이시라고 하신다. 정의의 오른팔로 붙들어 주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 될고 결국은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다투던 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되시며 주님의 오른팔로 붙들어주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신다. 주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을지라도 거룩하신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탈곡기로 사용하셔서 원수들을 까불어 바람에 날리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 앞에서 기뻐 뛰놀며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억눌린 빈민의 처지라해도 야훼께서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메마른 산에 개울물을 내시고 골짜기에 샘을 솟게 하시고, 마른 땅에 물이 솟아나와 사막을 늪으로 만드실 것이다. 사막에 각종 나무들을 심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야훼께서 손수하신 일임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 41:1-20
//섭리!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임마누엘만이 복음이요 영생인 이유다. 세상 정복자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복도 하고 패망 당한다. 가련한고 빈궁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도움(구원)을 받는다. 따라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람의 손으로 만든 (기우뚱 거리는) 우상에 의지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라고 교훈한다. 교만한 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질 것이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만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임마누엘! //종! 주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 주의 자녀라는 표현 대신 주의 종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를 주의 종이라고 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은 탈곡기로 사용하셔서 악인들을 키질해 버리신다. 구약에서는 주종관계가 확실하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친구로 부를 만한 인물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친구와 종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느냐, 아니면 그냥 복종하느냐의 차이 같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다. 물론 여전히 희미하게 보지만 말이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우리 예수께서는 종으로 사셨다. 그것도 철저히 종으로 사셨다.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랴! 철저히 종으로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놀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의 하나님(신)이요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라고 하신다.

이사야 40:12-31

이사야 40:12-31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풀어간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을 온전히 소개할 수 없다. 야훼의 뜻을 좌우할 사람이 없으며, 야훼를 가르칠 사람도 없으며, 야훼께서는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야훼 앞에서는 열방이라도 물방울이나 먼지일 뿐이다. 레바논의 산림은 하늘나라의 장작으로 쓰기에도 부족하고 거기 뛰노는 짐승들도 번제물로 바치기에 모자란다. 민족들을 다 모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니며 허무하여 그 자취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과연 하느님을 누구의 형상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장장이가 금은으로 부어 만든 우상이 아니시다. 손재주 있는 사람이 나무로 만들어 세운 우상도 아니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에 비하면 사람들은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통치자들과 위정자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허수아비와 같다. 하느님의 입김이면 그들은 말라버리고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그러면 거룩하신 하느님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천체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드신 것을 하나 하나 다 아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야훼 주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주님이 나의 사정을 정말로 모르실까? 그러나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줄 모르시며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이 하느님이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신다. 그래서 청년들이 힘이 빠져 허덕이고 장정들이 비틀거려도,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날 것이다.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 같을 것이다. 뛰어도 고단하지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40:12-31
//(출소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렇다면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사야(이사야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쓸 말이 무궁무진하다고 노래한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 //이사야는 (가장 먼저)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소개한다. 비교불가라고 선언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고 말한다. 사람이 만들어 세운 생명없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아시는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인생은 독수리가 날개쳐 솟아오르듯 하고 고단하지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그렇다고 ‘고단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를 너무 강조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살아도 이 땅에서는 ‘힘이 빠져 허덕이고 비틀거려도’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위로와 쉼을 얻게 된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지리적 귀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온(하나님의 다스림)으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바벨론에 눌러 앉은 사람들, 다니엘도 에스더도 귀하다. 오늘날에도 각자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성도가 귀하고 귀하다.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지리적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곳이 시온이요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