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8:1-15

열왕기상 18:1-15

삼년의 세월이 지났다.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하셨다. 비를 내리시겠다고 하셨다. 엘리야는 기근이 심한 사마리아로 아합을 만나러 갔다.
한편 아합은 궁내대신 오바디야를 불렀다. 사관은 오바디야가 야훼를 지극히 경회하는 사람으로 이사벨이 야훼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예언자 백명을 오십명씩 동굴에 숨기고 먹을 것과 물을 날라주어 살려낸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아합은 오바디야에게 전국을 다니면서 물을 찾자고 했다. 그들은 전국을 둘로 나눠 한쪽은 아합이, 다른 쪽은 오바디야가 두루다니며 물을 찾았다.
오바디야는 물을 찾으러 다니다가 엘리야를 마주쳤다. 오바디야는 엘리야를 알아보았다. 엘리야는 오바디야에게 아합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 있다고 전하라고 했다. 오바디야는 엘리야에게 자기가 가서 전하는 동안 야훼의 영이 엘리야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가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그러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말했다. 오바디야는 자신은 어려서부터 야훼를 경외하였고 백명의 야훼 예언자들을 살려내었는데 이제사 엘리야가 있는 곳을 보고하면 아합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야는 만군의 야훼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오늘 기필코 아합왕을 만나겠다고 맹세했다.

열왕기상 18:1-15

//어려서부터 야훼를 지극히 경외한 오바디야. 야훼를 지극히 경외한다고 하여서 야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오바디야가 야훼를 엘리야의 하느님 야훼라고 불렀다는 것과, 야훼의 영이 엘리야를 옮겨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서 오바디야가 하나님과 친밀한(인격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목숨을 걸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살려내었다는 것은 대단하다. 인격적 관계가 약한데도 경외심 하나로 하나님의 사람을 살려내는데 하나님을 잘 안다고 떠벌이면서도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교회지도자들을 어찌할꼬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같다.ㅠㅠ 아는 것 이전에 경외가 먼저가 아닐까 한다. 경외해야 인격적 교제로 발전할 수 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합을 만나러 바로 가면 되는데 도중에 오바디야를 만났다고 굳이 그를 중개인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한 오바디야의 행적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겠다. 아합의 궁내대신으로 섬기면서도 야훼를 경외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기근에 물을 찾아 다니는 것은 아합에 대한 충성이라기 보다는 백성을 위한 공직자의 마땅한 직무이행이다. 또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은밀하게 사용해서예언자 100명을 살리는 까마귀가 되었다.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라는 시조가 떠오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니 자신의 생명을 걸고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백로인지 까마귀인지는 겉을 보고 알 수 없다. 열매로 안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18//

열왕기상 17:8-24

열왕기상 17:8-24

개울물마저 말라버리자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시돈지방 사렙다로 가서 살라고 하셨다. 그곳에 사는 한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도록 해놓았다고 하셨다. 엘리야는 순종해서 사렙다로 갔다. 마을에 들어가서 땔감을 줍고 있는 한 과부를 만났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물 한 그릇을 떠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떡도 한 조각 부탁했다. 과부는 군 떡은 없으며 자신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방울이 전부며, 땔감을 주워다 모자가 마지막으로 먹으면 남는게 없다고 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걱정하지 말고 음식을 준비해서 자신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후에 아들과 함께 먹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했다. 이 말을 들은 과부는 순종했다. 과연 야훼의 말씀 그대로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눕게 되더니 병이 심해져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왜 자신의 죄를 일깨워주고 아들을 죽게했느냐고 하소연 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신이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자기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야훼께 기도한 후,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고 야훼께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셨다. 엘리야는 아이를 안고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야 알았다고 말했다.

열왕기상 17:8-24
//개울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 사렙다로 보내신다. 사렙다. 시돈 땅이다. 이사벨의 땅이다. 바알 신을 섬기는 땅이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는 시돈 땅이라고 해서 가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알은 풍요와 폭풍우의 신으로 알려졌다. 농경사회를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런데도 가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렙다 과부 모자가 처한 상황이 그 증거다. //엘리야가 가뭄을 피해 바알 신을 찾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렙다로 보내셔서 먹이신 것은 바알 신이 야훼 신(하나님)께 꼼짝 못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뒤주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은 기적적 사건은 야훼라는 신이 바알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과부가 엘리야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더이상 바알 신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알에게 기우제를 드렸어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반신반의 하면서 엘리야의 신(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목숨을 부지하지만 여전히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과부는 죽은 아들이 살아났을 때에야 엘리야가 신(하나님)의 사람이며 야훼라는 신(하나님)의 말씀이 참이심을 이제야 알았다고 고백한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끝이 없다. 이제 알았다고 하나, 알아가야 할 것이 오히려 무궁무진하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17/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만남에서 이 시대만 해도 유대 민족주의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엘리야는 별 저항 없이 이방 시돈으로 가고, 사르밧 과부도 엘리야를 거부감 없이 맞는다. 물론 가뭄과 굶주림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무슨 차이가 있으랴.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람도 낮아지고, 이방 여인도 낮아지는 곳이 하나님나라다.

열왕기상 16:29-17:7

열왕기상 16:29-17:7
유다 왕 아사 제 삼십팔 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렸다. 사관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어느 선왕들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했다고 운을 뗀다.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에게 가서 그를 숭배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바알 신당을 사마리아에 짓고 바알 제단까지 세웠다. 또 아세라 목상도 만들어 어느 이스라엘 왕들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속을 더욱 썩였다. 아합이 다스리는 동안 베델 사람 히엘이 예리고 성을 재건했다. 히엘은 기초을 놓을 때 장자를 잃었고 성문을 닫다가 막내아들을 잃었다. 눈의 들 여호수아를 시켜 하신 야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엘리야의 등장.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했다. 엘리야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신탁을 전했다.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야훼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르단 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에서 숨어 지내며 개울물을 마시라고 하셨다. 음식은 까마귀들이 날라다 주겠다고 하셨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에 순종했다.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고, 개울을 물을 마셨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는데 개울마저 말라버렸다. 온 땅에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16/

열왕기상 16:29-17:7
//여로보암의 길을 점점 넓혀가는 오므리 왕조. 모든 선왕들보다 하나님의 눈에 거슬렀던 오므리에 이어 왕이 된 아합에게도 모든 선왕들보다 하나님의 눈에 거슬렀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설상가상이다. 이방 왕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것은 크게 하나님의 눈에 거슬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바알 신을 섬기는 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바알 신을 섬기고 바알 신당과 제단에 아세라 목상까지 세우면서 하나님의 속을 썩였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의 속을 어디까지 썩일지 끝이 없다. //이런 아합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히엘의 여리고성 재건에서 여호수아 때 하신 말씀의 성취로 보여주셨다. 아합은 이 사건을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아합 왕에게 보내 대면 경고를 하신다. 엘리야가 다시 말할 때까지 비가 (이슬조차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엘리야라고 이스라엘의 가뭄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은 자연적(개울 물), 인공적(사람이 만든 떡과 고기), 그리고 기적적 (까마귀를 통해)으로 엘리야를 먹이셨다. 까마귀가 음식을 날랐다는 것을 설명할 길은 없어 보인다. (뭐래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래서 기적적이요 특별한 은혜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적적인 것만 은혜가 아니다. 은혜에는 당연한 것 같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모든 일상이 감사의 제목이다.

열왕기상 16:15-28

열왕기상 16:15-28

남 유다 왕 아사 제 이십칠 년에 지므리가 바아사 가문을 몰살하고 북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는 일주일만에 끝났다. (일주일만에 바아사 가문을 몰살할 수 있을까?) 전장에서 싸우던 이스라엘 군은 지므리의 반란 소식에 지므리 대신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인 오므리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오므리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회군해서 수도를 포위했다. 지므리는 궁궐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불에 타 죽었다. 사관은 지므리도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뜨려 야훼의 눈에 거스리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스라엘은 오므리를 왕으로 세운 파와 티브니를 왕으로 받드는 파로 나뉘었으나 우세한 오므리파가 티브니를 살해했다. 이렇게 유다 아사 왕 제 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왕이 되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이년간 다스렸다. 수도 디르사에서 육년을 다스린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을 세멜에게서 사서 요새를 건설하고 사마리아 성을 세웠다. 오므리는 어떤 선왕들보다 훨씬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했다.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밟아 백성까지 죄에 빠뜨리고 우상을 섬기에 하였다. 오므리가 죽어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를 계승했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15/

열왕기상 16:15-28

//시므리는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키고 왕이 되자 일주일 만에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 오므리가 반기를 들어 회군해서 시므리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절반은 디브니를 왕으로 세우길 원했다. 결국 힘이 우세한 오므리파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세상적 약육강식의 원리가 이스라엘의 왕위계승에 자리를 잡아간다. 이렇게 여로보암의 길이 더욱 넓어져 간다. //사관은 오므리가 어떤 선왕들보다 훨씬 더 야훼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정작 오므리의 행적은 시므리를 내리고 디브리를 죽이고 오므리 왕조를 세워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세겜)으로 옮긴 것만 짧게 기록한다. 아마도 오므리 왕조의 대표적인 왕 아합에 대한 인트로성격이 강하다. //사마리아에 요새를 세우고 수도를 옮긴 것은 오므리가 하나님 대신 (자신의) 힘을 믿는 왕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힘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튼튼한 요새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짓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하고 노래한다. 여로보암의 길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한다. 그러나 다윗의 길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길이다.

열왕기상 16:1-14

열왕기상 16:1-14

여로보암의 길을 걸은 바아사에게 야훼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내렸다. 바아사도 여로보암의 길을 걸어 같은 죄를 짓고 주의 백성을 죄의 길로 인도해 야훼의 분노를 샀다. 따라서 그 결국도 여로보암 가문과 마찬가지라고 하신다. 바아사가 여로보암을 몰살시켰듯이 바아사 가문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를 이었다. 여로보암을 이은 나답이 이년만 다스리고 죽었듯이 엘라도 2년간 다스렸다. 엘라는 신하 가운데 병거의 절반을 지휘하는 지므리라는 장군이 엘라가 술에 취해 있을 때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켰다. 야훼께서 예후에게 하신 말씀의 성취다. 사관은 바아사와 엘라가 죄를 짓고 이스라엘을 죄의 길로 인도하고 우상을 만들어 하느님 야훼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열왕기상 16:1-14
//여로보암 가문이 몰살 당했다.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한 바아사 가문도 몰살 당했다. 사관은 두 가문 모두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한다. 자기들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죄의 길도 인도했기 때문이다. 바아사 가문은 심판의 도구로 쓰였지만 그들도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사관은 바아사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7절에서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사관은 5:28에서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고 기록했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시킨 것이 왜 바아사 가문에 대한 심판의 이유로 언급될까?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시켰으면서도 여로보암의 길을 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언행불일치랄까? 여로보암 가문을 몰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여로보암의 길을 가지 말았어야 했다. 몰살시킨 가문의 길을 따랐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말씀의 성취를 빙자한 자기 욕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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