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1-10

열왕기상 1:1-10

//늙은 다윗. 신하들이 수넴 처녀 아비삭을 품에 안겨 주었어도 잠자리를 같이 못하는 다윗. 경건해서가 아니라 무기력하다는 증거다. 다윗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시편기자의 노래에 의하면 인생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백이십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은 모세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무기력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왕이 무기력하자 신하들이 설친다. 왕을 위해 이스라엘 사방 영토내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구했다는 것은 이방나라에서나 행하던 방법이 아니었나? 하여간 하나님의 사람이 무기력하면 하나님의 방법이 무기력해 진다.
//아비가 무기력하자 아들이 설친다. 오냐오냐 하고 키웠던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이방나라의 관례에 따르면 서열상 아도니야가 다음 왕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 세상의 서열을 따르시던가?
//지도가가 무기력하자 편이 나뉜다. 지도자가 무기력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한 편이 되어 다음 지도자를 구해야 할 신하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후계자 편에 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진 결과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어지면 결코 바른 길로 갈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무능력하게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9/01/

마태복음 28장

마태복음 28장

// 와서 보라. 예수께서 자기를 따라온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둘 중 하나는 안드레였고 그는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로 이끌었다. 빌립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던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했다. 우물가에서 메시야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마을 사람들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증거한다.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와서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부활의 새벽 무덤을 찾은 두 마리아에게 천사가 한 말이다. 천사는 그리스도의 시체의 부재를 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재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두 마리아가 빈 무덤을 확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마리아는 천사의 전한 말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급히 무덤을 떠났다. //와서 보라! 우리가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셨으니 ‘와서 예수를 보라’ 하고 말할 수 없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와서 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라고 하신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하신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라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가족됨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유일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부활에 참여하는 삶이다. 영생이다. 부활절 아침이다.

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57-66 (공동번역)

날이 저물었다. 예수의 제자 아리마태아 사람인 부자 요셉이 와서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지 빌라도는 쾌히 승낙했다.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하고 고운 베로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신 다음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놓고 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명절을 준비하는 날이 지나고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사흘이 되는 날 까지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어줄테니 잘 지켜보라고 말했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다. 

//예수의 시체를 거둔 요셉. 아리마대 사람이요 부자요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부자는 요셉의 소유에 관한 설명이요, 제자는 요셉의 삶에 관한 설명이다. 영생을 구하던 청년처럼 부자들은  예수보다는 돈을 따르는 돈의 제자가 되기 쉽다. 그런데 요셉은 부자였지만 돈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마태는 제자라는 명사형 대신 ‘따르다/배우다’ 라는 동사형으로 요셉의 제자됨을 기록한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자기 무덤에 장사했다. 밤이 되면 산 위의 동네가 환히 드러나듯,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 요셉은 짠 맛을 잃지 않았기에 빛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여인들이 그 빛의 증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에 주목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은 흩어졌는데도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들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 만큼 부활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사건이다. 단순한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냥 소생이 아니라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도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7:45-56

마태복음 27:45-56 (공동번역)

낮 열두시부터 온 땅이 어둠에 덮혀 오후 세시까지 이어졌다. 세시쯤 되어 예수께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구해주는지 구경이나 하자고 말했다. 예수께서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났다.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무덤에서나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며 몹시 두려워 했다. 많은 여자들이,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께 시중을 들며 따라온 여자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삼일 후 부활하실 것을 아셨다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인생에서도 ‘일각여삼추’라고 노래하는데 하물며 영원에 잇대어 사시는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삼일은 영원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여간 영원했던 삼위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깨어지는 일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는 상상이상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주님의 피의 댓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숨을 거두면 찰라의 순간도 기다릴 필요없이 주님의 품에 안길 것이다.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고백이었다. 이들이 가까이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면, 멀찍이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이 있었다. 공동번역은 이 여자들이 갈릴리부터 예수의 시중을 들며 따라왔다고 기록한다. 시중을 들었다는 단어는 섬기다로 번역되는 단어다. 요즘의 집사에 해당하는 단어다. 교회에 여집사님들이 많은 것은 이때부터의 전통이 아닐까? 시중받기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거리상으로는 예수님께 가까이 있었을지 몰라도 영적 친밀감은 거리와 상관이 없다. //다 큰 아들들을 위해 로비했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러나 솔직히 아들들이 예수를 따를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설령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헛된 욕심이 있었어도, 그래도 예수를 가까이 함은 복인 된다. 나에게는 말씀을 가까이 함이 복이다.

마태복음 27:27-44

마태복음 27:27-44 (공동번역)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가서 예수을 에워쌌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왕관을 엮어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렸다. 그리고 ‘유다인의 왕 만세’라고 떠들며 예수를 조롱했다. 그들은 예수에게 침을 뱉고 머리를 때리면서 희롱하고 나서 그의 겉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갔다. 그들은 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만나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가게 했다. 골고타, 곧 해골산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권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시고 마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진후 예수를 지키고 있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다인의 왕’ 이라는 죄목이 적혀있었다.
그 때 강도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 양편에 달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면 네 목숨이나 건지라고 조롱했다.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했다. 대사제들과 원로들도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살리면서 이스라엘 왕이냐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다고 말하며 조롱했다. 하느님을 믿고 또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보시라고 하며 조롱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했다.

//십자가는 조롱과 모욕의 상징이다. 이것이 어떻게 구원의 상징이 되었나? 힘이나 기적으로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조롱과 모욕을 그대로 받으셨기에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우리를 부인하고 우리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조롱과 모욕의 길을 가야한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고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면제된 길이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 지나가던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양편 강도들 모두 당장에 목숨을 살려야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의 길을 가셨다. 죽어야 부활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죽음의 길을 가야한다. 소생이 (생명 연장이) 부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