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32-40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산 모든 사람들의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다. 믿음으로 살았다고 이들의 삶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는 평가를 받는 다윗도 간음과 살인, 그리고 인구조사라는 불순종의 흑역사를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며 살았다. 믿음으로의 삶을 산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기도 하였고 의를 행하기도 하였고 부분적이지만 이땅에서도 약속을 받기도 하였고 다니엘처럼 사자들의 입에서도 살아났고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불의 세력에서도 살아났고 칼날의 피할 수 있었으며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는 용감할 수 있었다. 엘리야/엘리사를 각각 봉양했던 과부 둘은 자기 아들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남을 맛보았다(왕상 17, 왕하4). ‘믿음으로’의 삶은 승리만이 아니다. 핍박받던 성도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주기철 목사가 있지 않은가?)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투옥의 시련도, 돌에 맞는 것과 톱으로 켜는 고문과 배교에 대한 유혹/시험과 사형을 당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박해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바울이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한 그대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이땅에서 약속된 것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10절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나님나라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가는 우리(성도)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하나님나라는 온성도가 함께 지어져 가는 나라다.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시작한다. 그러나 교회로 구원을 완성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나님나라! …

히브리서 11:23-31

이어지는 ‘믿음으로’는 모세로 이어진다. 아니 모세의 부모에게로 이어진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왕(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동안 모세를 숨겼다.

부모의 ‘믿음으로’를 이어받은 모세는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는 무엇일까?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의 그림자로 보는 것일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서의 수모를, 즉 (고난의 현장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사귀는 것을,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편에 서는 것을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으로 여겼다고 이해하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모세에게 출애굽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유월절과 홍해를 건넌 사건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홍해를 건넌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믿음 없이 물벽사이로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똑같이 바닷물벽사이로 뛰어든 애굽군대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익사했다.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는 의미다. 믿음으로 여리고성도 무너졌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여리고성을 돌았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기 때문에,  불순종의 여리고성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오늘도 ‘믿음으로’ 자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를 넣고 읽어보았다. 크게 무리가 없다. 히브리서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여’가 맞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이다.

순종 소망 , Obey and Hope

//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마지막 문장이  Wait and Hope 이다. 기다림이 소극적이라면 순종은 적극적이다.

히브리서 11:13-22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말하면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죽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약속을 멀리서 보았다. 심지어 약속에 대한 보증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이땅에서는 타향살이를 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들은 약속이 이루어질 본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생각한 본향은 이땅에 있는 고향이 아니었다. 이땅에 있는 고향이라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본 본향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나라다.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전이 본향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이다.

믿음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시 소환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받은 약속이었던 이삭을 다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라도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가 (이삭이) 영원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순환이다.

이삭도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했다. 이삭이 원하는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했다는 의미다. 믿음으로 야곱도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축복했다. 요셉의 (원)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축복했다. 믿음으로 요셉도 (먼 훗날의) 출애굽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했다. 믿음이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에 대한 소망’이다.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이 곧 ‘믿음으로’다. 히브리서 11장 인물 어느 하나의 믿음도 추상적이지 않다. 그냥 하나님을 믿었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 자신들의 꾀를 따라 사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도 이땅에서가 아니라 본향, 하나님나라에서 온전히 받을 것을 소망했다. 받을 약속을 이땅에서 가불해서 살려고 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먼저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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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말하면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죽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 부분적으로만 누렸다. 그러나 온전한 약속을 멀리서 보았다. 심지어 그 약속에 대한 보증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이땅에서는 타향살이를 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들은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질 본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바라본 본향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나라다.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전이 본향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인 영생을 누리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성이다. 다른 약속은 없다. …

(히 11:13-22 읽기)

히브리서 11:1-12

믿음은? 개인적으로 히브리서 10장까지에서 믿음을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는 소망이라고 정리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 한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새번역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으로 번역한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히브리서 10장까지를 정리하면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함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다. 결국 돌고돌아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실제의 삶이고 보이지 않는 약속,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게 될 약속 (성자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의 증거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 믿음으로 자신에게 믿음 있음을 증명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의 첫번째 예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 믿음으로 된 것이라면 창조역시 성자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창조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교제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독자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것도 ‘믿음으로’ 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아는 가장 중요한 통로(방법)임을 전제한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직접증거는 없다. 그리나 아직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 즉 믿음에 대한 증거가 필요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함으로 간접 증거를 제시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한다.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가 어찌 하나님을 찾고 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 확실하다. 에녹뿐만 아니다.

아벨도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했다. 노아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방주를 준비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

아벨은 죽었으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자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허다한 별과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믿음은 순종이다. 가식적인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순종의 능력이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에 대한 확신이다.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이게 믿음이다.

히브리서 10:26-39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즉 새언약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새언약을 받은 후에도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미 드리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를 범하면 무서운 심판과 죄인을 태울 맹렬한 불만 있다고 경고한다.

모세의 율법을 범한 사람도 두세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용서없이 사형을 받았다. 새언약을 범하는 것은 성자 예수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거울지 (삼가) 생각하라고 명한다. 히브리서 저자와 독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으시는 분이시고 또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새언약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내면 벌이 아니라 큰 상이 기다린다. 새언약을 받은 후의 고난의 큰 싸움을 히브리서 저자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세상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을 기쁘게 당한 것도 이런 큰 고통이 바로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확신 이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큰 상(구원)을 얻는길이기 때문이다.

고난의 큰 싸움 끝에 있는 큰 상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란 우리가 새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후에 큰 상을 받기까지 고난의 큰 싸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다시오실 주님이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는 새언약을 받고도 죄를 범한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에 심판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어찌할 것인가? 히브리서 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마음의 예법에 따라 죄를 깨닫고 돌이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한다. 만약 첫 언약인 육체의 예법에 미련을 두고 다시 속죄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뒤로 물러나 멸망하지 말라고 한다. 속죄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것은 완전한 제사가 될 수없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누구나 죽는다. 그 후에는 승패만 있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도록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이미 드리셨다. 고난의 큰 싸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 근심에 사로 잡히는 것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결국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요즘 반복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라는 것이다. 나의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을 당하더라도 기쁨으로 그들 편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이라고 하신다.

정의와 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