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0:15-29

열왕기하 10:15-29 (공동번역)

그리고 다시 떠나가는데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그를 맞으러 나왔다. 예후는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눈 다음, “나는 그대를 진정으로 믿는데, 그대도 나를 그처럼 믿어주겠소?” 하고 물었다. 여호나답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예후는 “그대 생각이 그러하다면 손을 내미시오.”하고 말하였다. 여호나답이 손을 내밀자 예후는 그를 자기의 병거에 끌어올리며 말하였다. “함께 갑시다. 내가 얼마나 야훼께 열성을 품고 있는지 보여주겠소.” 그리고 그를 자기의 병거에 태워 사마리아에 이르러 아합의 잔당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이렇게 예후는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였다.
그리고 나서 예후는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아합은 바알을 조금밖에 섬기지 않았지만, 예후는 바알을 열성으로 섬길 것이다. 이제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사제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오너라. 내가 곧 바알에게 성대한 제사를 드리리라. 무릇 이 제사에 빠지는 자는 살아 남지 못하리라.”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박멸하려고 이런 계략을 썼던 것이다. 성회를 열어 바알을 예배하도록 하라는 예후의 지시를 따라 마침내 성회가 선포되었다. 예후는 이스라엘 각지에 사람을 보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여들어 바알의 신전으로 들어가니,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가득차게 되었다. 예후는 의상 맡은 자에게 바알으 섬기는 자들이 입을 예복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가 그들의 이입을 예복을 가져오자 예후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함께 바알의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말하였다. “여기 이 자리에 당신들과 함께 야훼의 종이 한 사람이라도 있지 않은가 잘들 살펴보시오. 다만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만 있도록 하시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희생제와 번제를 드리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예후는 신전 밖에 군인 팔십 명을 배치하고 일렀다. “이 바알의 무리들을 너희에게 맡긴다. 한 놈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놓치면 그 놓친자가 대신 죽으리라.” 번제를 다 드리고 나자 예후는 근위대와 장교들에게 명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죽여라.” 그리하여 근위대와 장교들이 들어가 무리를모두 칼로 쳐죽였다. 이윽고 그들은 바알 신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 바알 신전에 있던 목상들을 밖으로 꺼내다가 불에 태우고 바알 제단을 부수며 신전을 헐허 변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까지 그냥 남아 있다. 이렇게 하여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뽑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만은 버리지 못하여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그대로 섬겼다.

왕하10:15-29
//죄를 짓게 하는 환경을 뿌리째 뽑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러나 마음의 죄를 버리는 것은 어렵고도 어렵다. 예후가 그 덫에 걸렸다. 저자는 예후가 바알 숭배를 뿌리뽑았으나 여로보암의 죄만은 버리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그대로 섬겼다고 못박았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은 누구지?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말한 것으로 보아 요호나답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 하나님을 위한 예후의 열심과 여호나답의 열심을 비교한다면, 여호나답의 열심은 예후가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일상적 열심이었다면 , 예후의 열심은 보여주기식 이벤트성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후의 열심이 이벤트성이었다는 것은 예후가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여호나답의 열심이 일상적 삶(열심)이라는 것은 그의 열심(삶)이 유언으로 이어져 250여 년이 지난 후대에 자손들까지도 여전히 신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예레미야 35장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누구나 몇 번의 특별한 열심을 내볼수는 있겠지만, 아무나 일상적 열심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나의 열심은 금방 퇴색되고 말 것이다. 밥먹듯 호흡하듯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

열왕기하 10:1-14

열왕기하 10:1-14

//예후를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예후는 왕위를 지키기도 폐하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했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지혜로 피의 숙청(정)을 한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아합 가문에 내리신 말씀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셨다며 아합 가문에 속한 사람을 모두 죽였다. 왕자들 칠십 명과 아합의 측든들과 제사장들도 하나도 남기지 않 다 죽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아합 가문에 문안 왔던 유다 왕의 동생들 일행 사십이 명까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였다.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십분 경험하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 왕자들의 일행까지 다 죽이는 잔인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탐욕을 뒤섞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때도 매순간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명이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열왕기하9:1-13

열왕기하9:1-13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라고 명했다. 예후에게 기름부으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처음 하셨다. 그런데 실행은 엘리사의 명령으로 한 젊은 선지자에 의해 성취되었다. 엘리야가 불순종한 것인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회개하자 아합가문에 대한 심판을 미루셨다. 그래서 아합의 아들 때에 와서 집행된 것이다. 아합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저질렀어도 회개하면 벌은 유보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처럼 무궁하시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쓰임새와 상관없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수없다. 예후도 마찬가지다. 쓰임새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중요하기때문이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보다,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열왕기하 8:16-29

열왕기하 8:16-29 (공동번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유다 왕위에 오른 것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이었다. 여호람은 삼십이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동안 다스렸다. 그는 아합의 사위가 되다 보니, 아합 왕조가 하던 대로 이스라엘 왕들의 전철을 밟아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당신의 종 다윗을 보시어, 유다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으셨다. 일찍이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를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다스리고 있는 동안에 에돔은 유다에 반기를 들고 저희의 왕을 세웠다. 그러자 여호람은 병거대를 출동시켜 사일로 건너갔다. 왕과 병거대장들은 밤에 출동하였다가 도리어 에돔 군에게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였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도망쳐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에돔은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리브나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 때였다. 여호람 왕의 나머지 역사는 유다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람은 숨을 거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 다윗성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아하지야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여호람의 아들 아하지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의 일이었다. 아하지야는 이십이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 아달랴였다. 그는 아합 가문과 혼인하다 보니, 아합 가문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시리아 왕 하자엘을 맞아 싸우려고 라못길르앗으로 갔다. 그런데 시리아 군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혔다. 요람 왕은 라못에서 시리아 왕 하자엘과 싸우다가 입을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즈르엘로 돌아왔다.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지야가 이즈르엘로 가서 아합의 아들 요람을 문병하였다.

왛아 8:16-29
//유다왕 여호람과 여호람을 이은 아하시야의 꼬리표는 “아합 왕조가 하던 대로’ ‘아합 가문의 전철을 그대로 밟다’ 였다. 아합의 사위가 되고 아합 가문과 혼인한 결과 하나님의 눈을 거슬리는 일을 하게되었다.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자 유다 왕조는 급겨히 기울게 된다. 여호람 때는 에돔이 유다로부터 독립을 했다. 아하시야 때는 이스라엘과 연합해도 시리아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유다의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요담에게 문병을 가는 것은 형제애로 따지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형제애가 하나님 사랑보다 커서는 안 된다. 형제애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방과의 통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열왕기하 8:7-15

열왕기하 8:7-15 (공동번역)

엘리사는 다마스쿠스로 갔다. 마침 시리아 왕 벤하닷이 앓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왕은 하자엘에게 명을 내렸다. “예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내 병이 낫겠는지 야훼께 문의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라.” 하자엘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온갖 귀중한 물건을 낙타 사십 마리에 가득 싣고 예언자 앞에 나가서 말하였다.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받드는 시리아 왕 벤하닷이 앓고 계신데, 그 병이 낫겠는지 여쭈어보라고 저를 보내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엘리사가 대답하였다. “돌아가서, 그 병으로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아뢰시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야훼께서 나에게 알려주셨소.”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사람은 하자엘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로 얼굴을 굳히며 탄식하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어찌하여 우십니까?” 하고 하자엘이 묻자 엘리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대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장차 어떤 악한 일을 할지 그것을 알고 이렇게 우는 것이오. 그대는 이스라엘 요새에 불을 지르고 젊은이들은 칼로 쳐죽이고 어리아이들은 메어쳐 죽이며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를 것이오.” 하자엘이 “소인은 개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고 하십시까?” 하고 말하자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야훼께서 보여주신 환상 가운데서, 그대가 시리아의 왕임을 보았소.” 엘리사를 떠나 하자엘이 왕에게 돌아가자, 왕은 하자엘에게 엘리사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다. 하자엘이 대답하였다. “엘리사는 임금님께서 받드시 회복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튿날 하자엘은 담요를 물에 적셔 왕의 얼굴에 덮씌워 죽이고는 그 자리에 올라 앉아 왕이 되었다.

왕하 8:7-15
//엘리사의 명성은 시리아 왕에게도 알려졌다. 그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도 엘리사는 늘 시리아의 두통거리였다. 그리고 병에 걸린 시리아 왕 벤하닷은 분명 엘리사가 나아만을 고쳐준 과거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를 찾았다. //그런데 시리아 왕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세상 무당을 대하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엘리사의 신(하나님)에게 많은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낙타 40마리에 복비를 실어보냈다.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세겔, 옷 열벌을 가지고 엘리사에게 왔었다. 복비를 많이 내면 좋은 점꽤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엘리사는 복비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신탁은 시리아 왕이 병으로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사엘은 자신이 시리아 왕이 되는 신탁을 덤으로 받았다. 하사엘은 시리아 왕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며 엘리사의 말을 왜곡해서 전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혹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시리아 왕을 죽여 왕위를 차지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시리아 왕은 결국 병사했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신탁이 틀렸다고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까? 스스로의 안경을 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도 많은 예언자들이 환란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울에게 가지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환란이 있어도 가야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을 모르는 아사헬에게 기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시리아 왕위에 오른다는 하나님의 환상을 믿었다면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했다. 환상을 보는 것이 끝이 아니다. 환상에는 성령의 해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