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주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바사왕 고레스를 당대 최고의 왕으로 만들어 쓰셨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에게주셨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사 유대인은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셨다고 조서를 내렸다. 그렇다고 고레스 왕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의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고레스는 소수민족의 신마저도 자신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겠금 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고레스를 하나님 말씀 성취에 사용하신 것이다. 고레스는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금과 은으로 도와 주라는 내용을 조서에 포함시켰으며, 바벨론이 가져온 성전 그릇도 돌려주었다.

고레스의 조서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자는 귀환을 준비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금과 은과 여러 예물로 지원했다. 성전에서 약탈 당했던 오천사백개의 그릇도 고레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포로지에서 유다민촉을 총괄한 세스바살 (스룹바벨) 총독이 인도했다.

// 당대 세상 중심의 바사왕 고레스는 우주 중심의 하나님을 변방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남은 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바사에도 계셨다.) 남은 자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와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나를 통하여 성취하실 말씀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8:1-10

안식후 첫날, 주일 새벽 미명에 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았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했는데 큰 지진이 나며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러 치우고 그위에 앉아 두 마리아를 맞았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 떨었다. 시체마냥 얼어붙었다.)

천사는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있는 줄 알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 나셨다고 알려주고 빈무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 여자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살아 나셨고,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전하게 했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음질 쳤다.)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여자를 만나 평안하냐고 물어주셨다. 두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했고 예수님은 (여전히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는)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천사가 명한대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 부활의 주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과 천사의 광채에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말씀이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두 마리아도 무서웠다. 그러나 ‘말씀에 대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에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처음으로 만나주셨다. 무서움 대신 평안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천사를 통해 들려 주신 말씀, 구약의 성경 말씀.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히브리서 9:11-22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먹고 마시는 (육체의 예법을 따르는) 세상 나라의 대제사장으로 매년 드려야 할 속죄제를 드리신 것이 아니다. 대신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의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사람이 지은 장막(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물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소 하늘 보좌로 단번에 들어가는 완전한 피흘림이었다.

제물의 피로도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다 하니,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것이 새언약이다. 매년 갱신해야 하는 옛언약 대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은 것이다. 새언약도 옛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로 확증했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유언으로.

구원이란 죽은 행실에서 (먹고 마시고 씻는 육체의 예법을 따지는 세상나라에서) 돌이켜 (개혁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누가복음 23:33-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핑계가 아닌 사실이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오해하였다. 유대 백성들은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고 조롱했고 (로마) 군인들은 왕이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비웃었다. 누가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서 예수님 좌우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구원은  하나님이 던진 그물에 어쩔 수 없이 걸려드는 것이 아니다. 한 행악자가 비방한 것 처럼 아무곳이나 구원의 그물을 던졌는데, 그속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행악자는 알았다. 자신은 깊은 곳도 배 우편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물이 던져질  아무런 조건이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은 깊은 곳도, 배 우편에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물고기라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골고다에서 한 행악자는 구원의 낚시줄에 달린 바늘을 물지 않았지만 다른 행악자는 낚시 바늘을 덥석 물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것이 한 행악자를 골고다(죽음)에서 낙원(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시며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 그리고 숨지셨다.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작은 고통을 감내하며 구원의 낚시 바늘을 덥석 무는 일이다. 구원의 그물이 던져지지 않을 곳에 있을지라도 구원의 낚시줄은 드려진다. 은혜다. 덥석물어야 할 은혜다.

광야에서 모세가 든 놋뱀을 봐야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인자를 봐야 한다. 그리고 덥석 물어야 한다. 놋뱀처럼 한번 보기만 해야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봐야 한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임마누엘!

마태복음 26: 47-56

예수님이 잡히셨다. 예수님은 엘리사를 둘러쌌던 불말과 불병거보다 더 많은 열두 군단의 천군의 대장이셨지만 순순히 잡히셨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엘리사가 사환에게 한 것처럼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 6:16)”

제자들의 눈을 열어 열두 군단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셨으면 어땠을까? 칼과 몽치를 든 무리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게 열두 군단 천사가 아니라 칼과 몽치니 어쩌랴. 세상 셈법은 분명하다. 도망가야지. 영안을 뜨게 해주실 때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