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13-31

바울 일행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사울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나바 대신 대표자 역할을 한다) 구브로 섬을 떠나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다. 이곳에서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팀 대표를 바나바 대신 바울이 맡았다. 요한의 탈락과 바나바의 지도력이 관계있었을까 궁금하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자, 구약 말씀을 봉독하고 회당장은 바울일행에게 권면의 말을 해달라고 청했다. 바울은 웅변시합에서 큰 손짓을하며 “이 연사 외칩니다” 하듯이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자 다윗 왕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님을 소개했다. 회개의 세례자 요한이 전파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구원자 메시야라고 소개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관리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정죄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 형으로 죽게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말씀’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말씀의 성취이자, 말씀 자체로 이땅에 오셨다. 말씀(구약)을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모르는 자들,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말씀되신 예수는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말씀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보혜사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깨닫게 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도행전 13:1-12

바나바와 사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고 누가는 기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전해 주는 사람들과 전해 들은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구분해야 하나.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들 지도자들이 금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지위나 경험을 내려 놓고 주님의 뜻만 추구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느정도 안정적 성장을 하는 안디옥 교회라면 그냥 해오던 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니었다. 해오던 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제외하고는 안주하면 안된다. 이런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성령께서는 전도 여행을 가라고 구체적으로 명하시지 않고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일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안디옥교회는 순종했고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파송했다. 안수는 다분히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임을 상징한다. 두사람의 첫 발걸음도 성령을 따랐다. 실루기아로 가서 배를 타고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섬으로 갔다. 그리고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 여러 회당에서 전했다. 마가 요한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의 여정은 바보에 이르렀다. 바보에서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를 만났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란 뜻이고,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이고, 선지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마술로 사람을 미혹하는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지도자였다. 서기오 바울이라는 지혜있는 총독마져도 바예수와 함께 했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 일행이 왔을 때 하나님말씀을 듣고자 했다. 자칭 바예수, 이 마술사는 (이름은 엘루마요 이름 뜻은 마술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을 주목하고 엘루마를 책망하고 그로 맹인이 되게하였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이것을 보고 하나님말씀을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겼다.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 총독이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서 따왔을까? 아니면 안디옥 지도자 중 작은자여서 바울이 되었을까? (바울은 작다라는 뜻이라고 배웠다.) 하여간 ‘서기오 바울’과 ‘사울 바울’이 눈에 들어온다. 엘루마는 성령충만한 사울에 읭해 맹인이 된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에 의해  맹인이 되었고 삼일동안 보지 못하였었다. 엘루마는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얼마동안 해를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빛에 노출되어 사는 것과 흑암에 사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진정한 제자들에게는 쓸데없는 수사가 따라 붙지 않는다. 출신배경도 배설물로 여긴다. 엘루마처럼 예수의 아들이니, 유대인이니, 선지자니, 마술사라는 명함에 빼곡히 채운 수식어는 하나님앞에서 다 소용이 없다.  타이틀로 일하는 게 아니다. 성령께 순종하여 일해야 한다.

 

 

사도행전 12:18-25

사도행전 12:18-25

날이 새자 (예루살렘은) 베드로의 탈옥으로 발칵 뒤집혔다. 헤롯은 군대를 풀어 찾아보았으나 베드로를 볼 수 없자 애꿎은 파수군만 심문하고 죽여버렸다. 그리고 헤롯은 (종교적 중심) 유대를 떠나 (행정 중심 도시) 가이샤라로 갔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베드로를 죽이려 했지만 결국 행정적 무능함만 드러났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에게 화풀이를 하였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노를 풀기위해 큰 대회를 열어서 헤롯을 초청해 연설을 들었다. 사람들은 헤롯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칭송했고 헤롯은 우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였다. 주께서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게 벌하셨다.

고난과 핍박 중에 하나님 말씀은 흥왕하였다. 성도의 수가 느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흥왕하였다고 적었다. 말씀을 읽지 않는 교인들의 수가 더해자는 것은 하나님 망씀이 흥왕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교회의 쇠락이다.

흉년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부조를 전한 바나바와 사울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돌어갔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잠29: 18) 누가는 핍박가운데 성장하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니라 (믿는 자의 수가 많아 지더라)’ 라고 썼다(행12: 24).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지고 자기 소견대로 행한다. 그러니 단순히 (말씀을 배우지 않는) 교인 수가 느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 아니다. 오히려 쇠락의 전조다. 얼마나 말씀을 가르치고, 얼마나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가 교회를 자라게 한다.

사도행전 12:1-17

땅끝을 향하여

‘그 때’(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고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성령 안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때)라고 해서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정치적 핍박아래 놓였다. 유대인의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한 헤롯 왕가는 교회를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의 지지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를 죽였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좋자 베드로도 잡았다. 이왕이면 명절기간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많이 모였을 때, 유월절/무교절기간에 잡았다. 그리고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처형하려고 옥에 가두었다. 교회는 베드로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베드로가 백성들 앞에 끌려나가 죽기 전 날 밤에도 베드로는 감옥에 누워서 (편히) 자고 있었다. 두군인이 양옆에서 지키고 있고 파수꾼들은 옥문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주의 사자는 베드로를 깨웠다. 착고를 벗겨주었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로 하였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베드로는 천사의 말대로 겉옷을 입고 천사를 따라 갔다.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천사를 따라 파수꾼들을 지나고 저절로 열린 쇠문을 통과해 한 거리를 지났다. 그제서야 베드로를 인도하던 천사는 떠났고 베드로는 정신이 들어, 주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어 자신을 헤롯과 유대백성들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주신줄 알았다. 그는 즉시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헤롯은 대대적으로 베드로를 처형하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조용히 구해 주셨다.)

베드로는 문을 두르렸다. 베드도의 구속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문을 잠그고 모였을 것이다. 마침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기쁜나머지 문을 열어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들어가 베드로가 왔다고 전했다. 기도하던 사람들은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다. 로데가 미쳤다고 했다. 로데가 진짜라고 강조하자 베드로의 천사라고 했다. 베드로는 계속 문을 두드렸고 그들은 문을 열었다. 베드로였다. 놀랐다. (우리는 종종 결과를 알지 못하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을 모른다. 우리 생각 밖의 선물에 대해서는 무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길 원하신다.)  예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일을 전하라고 부탁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나 갔다.

스데반의 순교로 불거진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에서도 사도들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여전이 사도들을 옭아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성도들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를 방문하여 그들을 안수하고, 사마리아 지방을 다니면 복음을 전하였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고넬료를 만나 이방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교훈을 베드로는 자신의 투옥과  주의 천사를 통한 기적적 탈옥을 경험함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벗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베드로도 땅 끝을 지향해야 했다.

지도자가 있는 곳이 중심이지, 중심에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오순절 이후 얼마나 지났을 때 일어난 사건일까? 대략 10년정도 지났다고 본다. 숨가쁘게 읽어오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강산이 한번은 변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야보고 역시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당시 땅 끝 스페인 땅에까지 갔다 왔다는 것이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차적이라기 보다. 온 땅에서 증인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지리적 땅 끝보다 문화적 민족적 땅 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11:19-30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이 온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다 (고넬료 사건과 베드로의 예루살렘 보고회의 영향이었을까?)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서는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  주의 손이 말씀을 전하는 자와 함께 하셔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예루살렘 출신들의 한계를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들이 이겨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서 헬라인들도 주께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구브로 출신) 파송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성도들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권면은 능력있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 교회에 더하여 진 것을 ‘주께 더하여졌다’라고 표현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요,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수가 늘어나면 문제는 항상있다. 바나바는 이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마침 안디옥에서 가까운 다소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바나바와 함께 일년동안 늘어난 성도들을 가르쳤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디옥에서 가까운 다소 출신 사울이 섬사람 구브로 출신 바나바보다 안디옥을 더 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로마 시민권자 사울이 헬라인을 가르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야흐로 이방인 교회가 성장하고 있을 그 때,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다. 그 중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되어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편에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천하에 큰 흉년’이라면 안디옥도 분명이 흉년의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성도들이 흩어져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모든 물건을 통용할 만큼 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을 따라 나눠주며’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흩어진 성도들, 흩어진 교회들 사이에서도 이뤄진 예라고 생각된다. 각 지역교회, 개 교회는 교회 이기 주의를 벗어나야 할 이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